먼저, 나보다 한 달 먼저 'Great Escape Tour'(이하 GET)에 참여하고 후기를 쓴 평론가 이민희에 대한 디스부터 시작해야겠다. 후기를 잘 쓴 건 둘째 치고, 분량까지 2부로 나눠 너무 길게 써버렸기 때문이다. 꼴랑 한 편으로 쓰고 손 털면 성의 없다고 욕먹기 딱 좋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마치 퓰리처상이라도 탈 듯한 기세로 '탈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으며 취재를 하고 코멘트를 따기까지 했다고 한다. 낯가리는 난 어쩌라고. GET을 기획하고 꾸리고 있는 '제주바람'의 대표이자 선배 음악평론가이기도 한 박은석 대표는 2박 3일 동안 "민희는 이렇게 저렇게 했는데 넌 대체 뭘 하는 거냐?", "후기 쓸 사람을 잘못 골랐다.", "비행기값을 토해내게 하는 수가 있다." 등등의 말을 하며 날 핍박했다. 나뿐 아니라 내 뒤를 이어 계속해서 후기를 써야 하는 동료들에게도 이민희는 아주 안 좋은 선례를 남긴 셈이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 옆에 앉아있던 (장기하를 닮은) 황아무개 씨는 이렇게 말했다. "박은석 님은 정말 친절하고 부드러운 분이신 거 같아요." 아, 대체 이를 어찌 설명해야 할까.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 진실은 아니라는 말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이 글은 그런 2박 3일간의 핍박과, 그 핍박 속에서도 큰 기쁨을 주었던 제주, 그리고 GET에 관한 기록이다.
시작은 좋지 않았다. 제주로 가는 비행기는 기상악화로 심하게 흔들렸고, 내 옆에 앉아있던 아이는 심하게 부산했다. 계속해서 큰 소리로 말하고 창밖을 보겠다며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는 아이에게 '이놈 아저씨'가 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유민상처럼 살이 찌지도 못했고 결정적으로 아이의 엄마가 날 찾지 않아서 개입할 수가 없었다. 고난의 1시간을 보내고 제주에 도착하자 아니나 다를까, 비가 오고 있었다. 일정이 어그러질 것 같다는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그 비는 일정을 조금 바꿔놓긴 했지만 나의 걱정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제주가 품고 있는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해주었다.
일단 성게미역국으로 요기를 하고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사진작가 김영갑의 갤러리 두모악이었다. 계획대로였다면 '오르멍 들으멍'이란 프로그램 이름에 걸맞게 오름에 '올라' 게이트플라워즈(Gate Flowers)의 어쿠스틱 음악을 '들어야' 했지만, 비로 인해 두모악 인근에 있는 조그만 전시공간 '곳간 쉼'에서 공연을 감상했다. 공연 전에 먼저 GET에 동참한 탈출자들의 자기소개 시간이 있었다. 자신의 건강을 팔고, 가족을 팔고, 야근과 맞바꾸며 제주에 온 직장인들이 대다수였다. 1963년생부터 1993년생까지, 30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있었지만, 좋아하는 음악가와 함께 제주를 즐기고 싶다는 마음만은 똑같았다. 탈출자들은 이번에도 역시 여성들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20-30대 여성들 없었으면 대한민국 문화계는 죄다 망했다"는 '웃픈' 얘기처럼 이번에도 그 또래의 여성들이 많이 참여했다. 남자는 1호, 2호로 끝나는데 여자는 20호가 넘게 있었다. 여기가 '짝'의 애정촌이었다면 혼자서 도시락 까먹어야 하는 여성들이 부지기수일 정도로 성비불균형은 지난달에 이어 계속해서 이어졌다. 투어 프로그램에 '디아블로 정모'나 '제주 짠다마(당구) 체험'을 넣지 않는 이상은 당분간 이 불균형이 계속 이어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약간은 어색한 자기소개 시간이 끝난 뒤 시작된 게이트 플라워즈의 어쿠스틱 공연. 두 대의 어쿠스틱 기타와 단출한 타악 세트. 보컬 박근홍은 마이크도 없이 관객들 바로 앞에서 노래했다. 밴드에게나 관객들에게나 특별한 시간이었다. 제주도에서 듣는, 박근홍의 거친 목소리로 듣는 조동진의 '나뭇잎 사이로'는 특히 더 특별하게 들렸다. 마지막 곡으로 게이트 플라워즈의 히트곡(?) '예비역'을 부를 때는 관객들의 떼창이 더해졌다. 마치 두산 베어스 정수빈 선수의 응원가를 듣는 것처럼 여성들의 하이톤으로 듣는 '예비역'은 참으로 신선했다. 게이트 플라워즈의 베이스 연주자인 유재인은 어쿠스틱 EP 한 장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할 정도로 밴드에게도 인상적인 경험이 된 듯했다.
공연이 끝난 뒤에는 김영갑 갤러리의 사진들을 감상했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 같은 책을 통해서만 접했던 제주의 사진을 직접 볼 수 있었다. 나는 치열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그럼에도(혹은 그렇기 때문에) 치열한 글이나 음악, 미술 작품들에 번번이 무너지곤 한다. 김영갑의 사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원하는 사진을 얻기 위해 견뎌냈을 시간과 노력을 분명하게 짐작할 순 없지만 사진에서 전해지는 열정적인 기운은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근위측증에 시달리면서도 세상을 뜰 때까지 제주의 오름들을 프레임에 담아내고자 했던 그의 뜨거운 사진들을 뒤로 하고 게이트 플라워즈의 멤버들과 함께 용눈이 오름에 올랐다. 때마침 비는 그쳤고 하늘만이 잔뜩 흐려있었다. 이번에 제주에 처음 와본 '광역시 촌놈'인 나에게 오름의 풍경은 벅찬 감동 그 이상이었다. 오름을 오르던 길, 계속해서 불어오던 바람, 그리고 오름 정상에서 바라보는 압도적인 풍경은 사람을 '텅 빈 충만' 그 자체로 만들어놓았다. 동행했던 한겨레신문 이정연 기자가 "제주는 진리"라는 말을 할 때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이 여행은 '위대한 탈출'이 아니라 '위대한 치유'라고 말을 할 때도 역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경규와 한혜진이 없는데도 짧은 등산 하나만으로 이렇게 '힐링' 효과를 준다는 건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좋지 않다고 생각했던 흐린 날씨는 오히려 오름의 풍경과 더 잘 맞는 듯했다. 만약 해가 쨍쨍한 맑은 날씨였다면 그날 그때의 감정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2박 3일의 일정 가운데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건 이 오름에 오를 때였다. 오름에서 주변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모든 잡념-밥벌이의 괴로움, 원고 걱정, 두산 베어스는 왜 야구선수들이 야구를 못하는 걸까 하는 답답함, 이민희에 대한 원망 등등-이 사라지는 듯했다. 나의 임무는 '침투'였다. 탈출자들 사이로 침투해서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나의 임무였지만 그 자리에서 굳이 침투는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에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情 하나쯤은 다들 있지 않은가. 표정에서 모든 것이 드러났다. 더없이 만족스러운 표정들. 누구는 두 팔을 벌리고 바람을 맞이하고, 누구는 자리에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비록 방목해 키우는 소들 때문에 곳곳에 쇠똥들이 있었지만, 쇠똥밭에서 굴러도 거기가 오름이라면 얼마든지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연과 나, 그리고 탈출자들의 마음과 마음이 합일하는 순간이었고, 신화의 이민우(M)가 얘기했다는 "너희 생각 내 생각 똑같아"가 이루어지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배고픈 마음도 똑같았다. 아무리 오름이 좋아도 오름의 풀을 뜯어먹으며 살 수는 없는 일. 저녁식사를 위해 아쉬움을 두고 오름을 떠났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닭고기 샤브샤브와 백숙, 그리고 녹두죽 3종 세트였다. 잭필드 3종 세트 같은 저가상품과는 격이 달랐다. 고기의 질 자체가 달랐다. GET의 또 다른 장점은 이렇듯 훌륭한 맛집 안내였다. 2박 3일 동안 제주의 아름다운 곳들을 알려주는 한편으로 끼니 때마다 훌륭한 먹거리로 탈출자들을 대접했다. 공식 '(초딩) 6학년 입맛'인 나조차도 흡족하게 먹었으니 ‘가장 보통의 존재’들이라면 누구나 다 만족스럽게 먹었을 것이다. 성게미역국, 닭고기 샤브샤브, 백숙, 녹두죽, 해물 전골, 고기국수, 해장국 등등 상황에 맞게 호사로운 음식들이 식탁 위에 올랐다. GET은 위대한 탈출, 위대한 치유, 그리고 위대한 식탁이기도 했다.
첫날의 일정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저녁식사 뒤 숙소에 돌아와서는 연회장에서 하루를 정리하는 뒤풀이가 또 기다리고 있었다. 치킨과 돔베고기(삶은 돼지고기), 그리고 주류 회사에서 협찬한 1,500개의 캔맥주가 있었다. (나의 어머니가 자주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하도 먹어 "주둥이가 욕할" 지경이었다. 제주바람의 홍보이사이자 붕가붕가레코드의 대표인 고건혁(aka 곰사장) 이사가 진행한, 제주바람과 GET에 대한 설명을 담은 스티브 곰스의 프레젠테이션이 있은 뒤 가볍고 편한 술판이 벌어졌다. 맥주와 함께 삼삼오오 모여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고 그럴수록 이야기는 계속해서 꼬리를 물었다. 그 자리에서 조금 일찍 '탈출'한 나는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내일은 좀 더 깊이 침투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달게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 일어나려는 순간, 이민희 때문에 이 글을 2부로 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은 2부에서 깨겠다.
2000년에 인터넷 음악방송국 '쌈넷' 기자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웹진 '가슴' 편집인과 한겨레신문 객원기자를 지냈으며, 현재 웹진 '보다' 편집장과 '100비트'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참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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