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1학년 초반의 일이다.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심지어 나와 같은 해에 우리 과 교수로 부임한 (지금까지도 나의 지도교수인) 선생님의 차를 얻어 탈 기회가 생겼다. 우리 동기들에게 “입사동기”라 농을 치기도 하던 소탈한 선생님 덕분에 차 안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내가 록, 블루스 등의 음악을 좋아한다는 얘기에 대시보드 보관함에 흥미 있어 할 음악이 있을 거라고 하셨다. 과연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알이엠(REM) 등의 테이프가 가득 담겨있었다. “이거 함 들어봐라, 재밌다”면서, [Rhythm & Blues]라고 견출지를 붙여놓은 테이프를 추천하셨다.
테이프를 맨 앞으로 감아서 플레이를 하자, 두 곡이 이어졌다. 첫 곡은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 1935년 녹음한 ‘Georgia On My Mind', 두 번째는 레이 찰스가 1960년에 녹음한 같은 곡이었다. 솔직히 내 느낌은 마이클 볼튼(Michael Bolton)이 불러서 잘 알려진 그 곡의 옛날, 그것도 아주 옛날 버전이란 것뿐이었다. 선생님은 같은 가사지만 그 가사를 표현하는 보컬과 악단의 분위기를 강조했다. 관악기의 날카로움과 질박한 루이 암스트롱의 보컬은 땀과 노동, 고통으로 점철된 고향 조지아에서 벗어나보겠다며 도시로 막 이주한 세대가 가진 고향에 대한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는 거다. 그에 반해 세련된 도시적 감수성이 내면화 된 25년 후의 사람들에게 머나먼 고향 조지아는 달랐다. 레이 찰스의 음악을 듣는 도시민들에게 조지아는 아련하고 따스한, 힘들었지만 맘 한 구석이 편안해지는 고향으로 이미지화 되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Georgia On My Mind'은 미국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이주와 문화적 감수성 변화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얘기였다. (참, 조지아 출신인 레이 찰스와 달리 루이 암스트롱은 루이지애나 출신이다. 조이아나 루이지애나나 흑인 농장이 많던 미국 남부 지방이긴 하지만)
사실 한국 트로트에서도 고향의 변화는 비슷하다. 살기 위해 떠나지 않을 수 없던 척박하고 눈물 나는 슬픈 곳에서 따스한 정이 배어있는 추억의 장소로 변해가지 않았던가. 처음부터 얘기가 샜다. 그렇지만 레이 찰스라는 아티스트가 미국인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어느 정도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에피소드였으리라 생각한다. 레이 찰스는 소울의 아버지로 통한다. 미국 남부 아프리카계 미국인 교회 특유의 영적이면서도 흥겨운 가스펠 정서와 시끌벅적하고 텁텁한 원형질의 재즈 / 블루스, 틴팬앨리로 대표되는 매끈하고 세련된 도시 감각을 하나로 융합시킨 장본인이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아프리카계 미국인 음악적 정서를 제대로 꿰뚫고도 도시 감각까지 갖춘, 가장 미국적인 통속성을 표현하는 아티스트라 하겠다. 레이의 음악 곳곳에 박힌 이러한 감각은 여러 음악 장르가 행복하게 크로스오버 되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크로스오버는 실은 슬픈 현실 위에서 만들어졌다.
1930년생인 레이 찰스는 5살 때 녹내장이 발병해서 7살 무렵 완전히 앞을 볼 수 없게 된다. 철도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일찍이 어머니와 헤어졌고, 어머니 혼자 형제들을 키우느라 집안은 언제나 엉망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레이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어 준 것은 라디오였다. 그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블루스, 가스펠에서 클래식과 라틴 음악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았고 즐겼다. 눈이 멀기 전부터 동네의 각종 농사 용구, 자동차, 피아노 등의 복잡한 기계가 움직이는 방법에 호기심을 갖던 레이는 이 시기 단순히 소리를 통해 행복만 느낀 게 아니었다. 끊임없이 음악을 들으며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음악의 요소와 구조를 음미하고 연구했던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기에 오히려 얻어진 소리에 대한 열린 시각은 레이 찰스의 음악적 소양을 풍부하게 만들어줬다. 나아가 음악은 레이로 하여금 세상을 느끼고 만나러 나설 수 있는 용기를 심어줬다.
1946년 어머니를 여의고난 후, 레이는 여러 밴드를 쫓아 전국을 떠돌았다. 매일 밤 클럽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가끔씩 들어오는 편곡 일을 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삶은 곤궁했지만 레이의 천재성은 알음알음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려서부터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음악을 즐긴 레이는 특정 장르(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의)의 특성에 기댄 편곡이 아니라 다양한 음악적 요소를 두루 섭렵한 보편성을 띄었기 때문이다.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무대에 오르는 패션 감각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드디어 1953년 기타 슬림(Guitar Slim)의 불후의 명곡, ‘The Things That I Used to Do'의 편곡을 맡게 되면서 전국구 연주/편곡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강렬한 외침 속에 알 수 없는 고독을 표현하는 걸출한 기타 슬림의 목소리를 감싸는 간략하면서도 경건한 느낌의 피아노 연주는 곡을 더욱 사색적으로 만들었다. 1959년 발표된 [The Genius of Ray Charles] 앨범 타이틀에서 엿볼 수 있듯 레이 찰스는 음악계에서 알 사람은 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천재였다.
1959년 10월에 발매된 알앤비, 소울, 블루스, 재즈 아티스트 레이 찰스의 앨범으로, 2003년 롤링 스톤 매거진의 '역대 가장 훌륭한 앨범 500'에서 263위에 랭크된 바 있는 명반이다. 특히 이 앨범에는 'Let the Good Times Roll'과 'Don't Let the Su..
빠르고 경쾌한 터치에서 가스펠의 경건함까지 레이 찰스의 손가락은 건반 위를 종횡무진 날아다녔다. 이 감수성은 그대로 레이의 목소리로 이어졌다. 1950년대 초반 ‘Sinner's Prayer’와 ‘I Got a Woman’ 등이 히트하면서 레이 찰스는 누구의 피아니스트나 편곡자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건 아티스트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1959년 가스펠의 익숙한 멜로디를 차용하고, 점프 블루스 스타일에 라틴 리듬을 가미한 ‘What'd I Say’를 통해 메인스트림 팝 차트를 점령하고야 만다. 이 노래의 경쾌함 속 숨겨진 진한 가스펠의 기운 때문에 사람들은 레이 찰스의 음악을 당시 유행하던 리듬 앤 블루스, 점프 블루스 혹은 록큰롤 등의 이름 대신 소울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다. 소울은 특정한 형식이 아니라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가슴 저 아래를 울리는 특별한 감정이 담긴 음악을 일컫는 표현이었다. 그것도 도시로 이주해 인종차별의 시선 속에 육체노동으로 연명하던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또 그 기운으로 춤도 추게 만드는 게 소울 음악이었다. 1962년 발표된 레이 찰스의 분신과도 같은 팝의 명곡 ‘I Can't Stop Loving You’가 수록된 앨범의 제목 [Modern Sounds in Country and Western Music]을 보라. 반짝대는 도시 감각과 희망을 찾아 도시로 이주한 하층민의 마음을 감싸는 레이 찰스의 음악적 자신감이 그대로 묻어있지 않은가. 레이의 질주는 그대로 소울 뮤직의 역사가 되었다.
당대의 선진적 악기였던 해몬드 올갠과 혼 섹션의 조화를 통해 미국 대도시의 감수성을 전하는 ‘One Mint Julep’, ‘Unchain My Heart’, ‘You Are My Sunshine’에서 통통 튀는 매력과 거침없는 속도감으로 화끈한 남성성을 과시하는 ‘Hit The Road Jack’, ‘I Don't Need No Doctor', 'Busted’ 등이 1960년대 내내 차트를 누볐다. 그 뿐인가? 글의 시작에서 언급한 ‘Georgia On My Mind’를 비롯해서 ‘That Lucky Old Sun’, ‘Crying Time', ‘Eleanor Rigby’ 등을 통해 가슴 저미는 발라드의 세계를 완성했다. 그래서 레이는 소울의 아버지면서 최고의 블루스 피아노 연주자였고, 재즈의 영감으로 가득했던 천재였다. 그는 일평생 셀 수 없이 많은 레코딩을 남겼는데, 컨트리에서 재즈와 블루스 록에 이르는 미국 대중음악의 거의 모든 장르가 망라되어 있다. 천재(Genius)라는 표현은 레이 찰스의 별명일 뿐 아니라 그의 음악을 아는 이들이 레이를 얘기 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하고 유일한 단어다.
레이 찰스는 가장 미국적인 아티스트다. 그는 분명 예술의 아름다움에 앞서 당장 오늘을 살기 위해 음악을 했다. 그런데 그 음악이 그에게 부와 명예를 넘어 희망을 안겨다 주었다. 예술은 시각 장애를 딛고 일어설 수 있게 만들었고, 그가 부른 소울 넘버들은 1960년대 미국의 인종차별에 항거하는 모든 이에게 힘을 실어줬다. 지독한 가난, 천재성, 엄청난 성공, 순탄치 않았던 가정생활과 약물로 점철된 레이의 삶. 일그러졌지만 그래서 더 빛나는 아메리칸 드림 그 자체다. 선글라스와 피아노, 레이 찰스만 있다면 그 무대는 최고의 순간이 된다. 레이건과 클린턴, 민주당과 공화당 정권의 온도차가 가장 심했던 두 대통령 모두 레이 찰스에게 백악관 공연을 부탁한 까닭이 여기 있다. 가장 미국적인 대중가수, 동시에 가장 미국적인 음악가 레이 찰스. 그래서 그가 부른 ‘America, The Beautiful’은 단순한 미국 만세를 외치는 노래가 아니다. 찬사와 설움, 분노와 환희가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노래다. 그리고 분명한 한 가지. 이제 레이 찰스의 음악은 미국보다 아름답고, 미국의 어떤 힘보다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호오는 분명하지만, 취향의 다름을 옳고 그름이라 오해하는 자들을 경멸하는 음악딴따라 글쟁이이자 문화인류학꾼. 변방의 잡놈들의 네트워크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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