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임스 브라운(JB)을 처음 본 건 록키4를 상영하던 명보극장이었다. 소련(당시는 냉전의 한 복판이었다) 권투선수와 싸우는 록키의 친구 아폴로는 식전 행사에서 상대편 기를 죽이려고 화려한 쇼를 연출한다. 라스베가스 쇼걸들이 무대를 휘젓고 강한 비트의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JB가 등장해 노래를 불렀다. 미국이 세냐 소련이 세냐 힘겨루기가 주제였던 영화는 그 장면을 통해 가장 미국적인 것이 무엇인가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다. 아폴로는 모자와 팬츠에 성조기를 새겨 넣고 JB옆에서 알짱거리며 춤을 추었으니까. 유감스럽게도 아폴로는 드라고의 강펀치에 맞아 쓰러진 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영화는 (미국의 패배에) 분노한 록키가 분연히 일어나 드라고에게 승리를 거두고 성조기를 휘날리는 것으로 끝이 난다. 괜히 트집잡는 것 같지만 소련에 무참히 깨지는 아폴로가 흑인이라는 것, 그의 등장이 JB와 함께였다는 것이 맘에 걸린다. 아폴로의 미국과 록키의 미국은 개념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에서 JB가 부른 ‘Living In America’는 그야말로 백만 년 만에 히트한 곡이었다. 1933년생이니까 우리나이로 따지면 쉰네 살이었다. JB에게 1980년대는 악몽의 시기였는데 소울의 대부, 펑크(funk)의 제왕이라는 찬사가 무색한 시절이었다. 세 번째 부인과의 폭력사태로 가십란를 달구었고 자동차 사고와 경찰 폭행으로 실형을 선고 받기도 했다. 히트곡 없이 가십란에 오르내리는 처지였지만 한편으로 80년대는 JB를 진정한 흑인음악의 제왕으로 추대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힙합이 등장한 것이다. 뉴욕 퀸즈 브릿지와 브롱스 거리에 등장하는 DJ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소스가 바로 제임스 브라운이었다. 샘플링된 곡들을 찾아주는 사이트 ‘후스 샘플드(who’s sampled)’에 공식 등록된 것만 해도 5천 곡을 훌쩍 넘어선다. 다른 아티스트에 비할 수 없는 수치이다. 힙합의 형태소가 펑크(funk)라는 걸 고려한다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제임스 브라운의 업적 중에서 가장 위대함과 동시에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바로 펑크(funk)의 창시자라는 닉네임이다. 장르란 대게 일정한 음악적 흐름 속에서 평론가들이 명명하고 대중들이 수용하는 형태로 만들어져 왔다. 그래서 자기 음악을 무슨무슨 장르라고 불러달라는 뮤지션들을 낄낄거리며 비웃게 되는 것이다. 한 명의 뮤지션이 새로운 장르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JB는 예외로 해야 한다. JB가 훵크를 만들었다는 데 반기를 드는 사람은 없다. 물론 음악이 펑키(funky)하다는 표현은 아트 블레이키(Art Blakey) 때부터 있어왔지만 비밥 시대에 펑키(funky)는 어디까지나 수사에 불과했다. 다시 말하지만 JB는 펑크(funk)를 만들었다. 이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한 뮤지션이 있을까?
어쩌면 JB가 아니었더라도 펑크(funk)는 탄생되었을지도 모른다. 50년대 후반 알앤비는 10대 문화와 얽히면서 나날이 자극적인 사운드가 되어 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알앤비와 JB 사이에는 엄청난 에너지 장이 존재하는 것 같다. 똑같이 가스펠의 영적인 기운을 받았지만 동시대 소울 뮤지션들과 비교해도 JB의 에너지는 과잉이라고 할 만큼 그 양과 질이 다르다. 당장 ‘Night Train’이나 ‘Papa’s Got Brand New Bag’을 부르는 1960년대 흑백영상들을 찾아보라. 펑크(funk)의 흥분은 물론이고 20세기 엔터테인먼트의 근본이 여기에 있었구나 생각할 만큼 놀랍기만 하다. 믹 재거(Mick Jagger)도 로버트 플랜트(Robert Plant)도 마이클 잭슨(Micheal Jackson)도 여기서 출발한다. ‘록 시대의 가장 중요한 뮤지션’이라는 평가는 틀린 말이 아니다. 이렇게 하드코어하다 보니 알앤비의 백비트를 증폭시켜 스타카토로 코드를 분해버린 펑크(funk)의 극단적인 에너지로 진화한 것이 당연해 보이기까지 하다. 물론 JB의 밴드 멤버인 피 위 엘리스(Pee Wee Ellis)나 마세오 파커(Maceo Parker), 부치 콜린스(Bootsy Collins) 같은 연주자들의 공을 빼 놓을 수 없다. 특히 지미 놀렌(Jimmy Nolen)이 만들어낸 E9코드 자가자가장 리듬과 캣피쉬 콜린스(Catfish Collins)가 친 쨉쨉이 리듬기타는 펑크(funk)의 상징이 되었다.
여기서 펑크(funk)의 지분을 나누는 것은 별로 유쾌하지 않은 일인 것 같다. 다만 한가지 집고 넘어갈 것은, JB의 펑크(funk)는 무대 위에서 이루어진 총체적인 엔터테이닝이었다는 점이다. 흑인 교회의 열광적인 간증의 분위기로 시작해서 섹스 앞에서 동등한 육체의 흥분을 체험하게 만드는 과정을 거치면 관객들은 뜨거운 동지애를 나누게 된다. JB의 펑크(funk)는 분명히 카니발을 위한 기능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시대적 이데올로기가 작동한다. 극단적 흥분을 통한 카타르시스는 흑인을 위한 것이다. 황인종인 나도 JB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긴 한다. 하지만 내가 만약 흑인이었다면 몇 배는 더 진한 오르가즘을 느끼지 않았을까? 실제로 JB는 ‘Try Me’(1960)나 ‘I Got You(I Feel Good)’(1966) 같은 곡을 통해 만인이 좋아하는 슈퍼스타의 자리에 올랐지만 1969년 ‘Say It Loud, I’m Black and I’m Proud’ 이후 1970년대에 들어서면 좀 더 하드코어한 펑크(funk)를 선보이며 흑인 사회에 천착한 메시지를 주로 설파한다. [There It Is](1972)나 [The Payback](1974), [Hell](1974) 같은 묵직한 펑크(funk)로 좀 더 매니악해졌다. 1960년대 흑인인권운동이 좌절의 분노를 거치면서 1970년대 블랙스폴로이테이션(Blaxploitation) 영화를 낳은 분위기 속에서 JB는 여전히 흑인 대통령(‘Funk President’)으로 군림했다. 길거리에서 춤을 추며 구두를 닦아 돈을 벌고, 절도로 징역을 살고, 감방에서 만난 바비 버드(Bobby Byrd)와 함께 노래를 시작한 JB다. 그가 가난한 흑인이 아니었다면 이런 음악은 결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엔터테이너는 정치가가 아니다. 하지만 때로는 엔터테이너가 정치가보다 더욱 포괄적으로 계급과 집단을 대변한다. 미국의 대통령이 흑인인 지금 흑과 백을 나누는 것이 시대착오적인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JB의 위대함은 펑크(funk)를 만든 에너지와 함께 블랙 파워의 상징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라는 사실을 병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록키4에서 아폴로와 함께 춤을 추던 JB의 모습은 심히 유감스럽다. 물론 JB는 오랜 슬럼프에서 자신을 꺼내줄 수단으로서, 엔터테이너로서 출연한 것이겠지만 냉전의 상징으로 쓰러지는 미국으로 소모되었다는 점은 불명예스럽다. 쇼걸들의 실리콘 몸매야 분명 미국적인 것이지만 JB는 그렇게 라스베가스 눈요기감으로 공연을 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Living In America’는 그의 수많은 하드코어 펑크(funk) 트랙에 비하면 수준 떨어지는 싱글이 아니던가 말이다.
'음악취향Y'와 '100비트'에서 전자인형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고 있다. 추억이나 곱씹는 노인이 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려는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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