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머리 스쿨의 앨범에서 모습을 드러낸 후 빈지노가 한국힙합의 가장 기대되는 유망주로 꼽혀왔다는 사실을 굳이 다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어와 단어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그의 유려한 플로우는 가사를 논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한 청각적 감흥을 선사했고, 일상의 소소한 것들을 유머와 여유를 섞어 풀어내는 그의 스토리텔링은 마치 네이티브 텅(native tongues)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분명 주목해야할 재능 있는 래퍼의 출현이었다.
모두가 기다려온 Beenzino의 첫 솔로 앨범 [ 2 4 : 2 6 ] 2009년 혜성처럼 나타나 실력을 인정 받으며 단숨에 최고의 MC 대열에 선 Beenzino. 프로젝트 팀 Jazzyfact과 Hot Clip으로 꾸준히 좋은 음악을 선보여 온 그의 솔로 앨범은 ..
데뷔 후 첫 솔로 EP인 이 앨범은 일종의 소품집에 가깝다. 물론 이 말이 제대로 된 평가는 다음 앨범에 유보해야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앨범 타이틀에서도 드러나듯 앨범의 초점은 특정한 시기와 감성에 맞추어져 있고, 레이블의 세를 과시하는 ‘Profile’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든 수록곡이 놀랍도록 일관된 면모를 보인다.
다시 말해 앨범의 수록곡은 대한민국에 사는 20대 중반의 (랩을 하는) 남자의 일상을 다룬 가사는 물론이요, 흡사 리틀 브라더(Little Brother)나 재즈힙합 일군을 떠올리게 하는 레이드-백(laid-back) 스타일의 프로덕션, 그리고 멜로디를 적절히 가미한 랩과 가벼운 싱-송이 군데군데 삽입된 곡 구성까지 서로 닮아 있어 마치 앨범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곡처럼 느껴진다. 때문에 이 앨범은 빈지노가 데뷔작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겠다는 강박보다는 그간 자신이 꽂혀 있었거나 관심을 가지고 있던 특정한 스타일과 정서를 집약하고 가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앨범은 빈지노의 매력을 다양하게 전시한다. 스트리트웨어 브랜드 칼하트(Carhartt)의 실제 모델이기도 한 그의 전력이 오버랩 되거나(‘Nike Shoes’) 재지팩트(Jazzyfact)의 여운이 떠오르기도 하고(‘Summer Madness’), 특유의 진솔한 가사로 어필하다가도(‘I'll Be Back’) 가볍지 않은 젊은 예술가의 면모를 드러내기도 한다(‘Always Awake’). 도끼의 싱글 ‘Fantom'에서의 랩이 생각나는 ‘Profile’의 배틀 랩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가장 흥미로운 곡은 역시 ‘Aqua Man’과 ‘If I Die Tomorrow’다. 딱히 겹치는 부분이 없을 것 같은 두 곡의 공통점이 있다면 ‘힙합의 장르 문법’ 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Aqua Man’의 제목만을 보고 실제 가사를 예상한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여자의 어장에서 헤엄치는 남자를 아쿠아 맨으로 상징한 이 곡은 힙합을 여성에 빗대거나(커먼(Common)의 ‘I Used To Love H.E.R.') 총을 둘도 없는 친구로 비유한(지유닛(G-Unit)의 ‘My Buddy') 본토의 힙합 곡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이러한 비유와 상징이 힙합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기발한 비유와 절묘한 상징이 래퍼들의 작사에 오랫동안 중심화두로 작용해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동시에 이 같은 기준이 래퍼들의 가사와 그 문학성에 대한 평가의 중요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If I Die Tomorrow’는 어떤 의미에서 한층 더 직접적이다. ‘내가 (언제) 죽는다면’이라는 가정은 갱스터 랩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다. 투팍(2Pac)까지 갈 필요도 없다. 불과 한 달 반전에 발매된 메이백 뮤직 그룹(Maybach Music Group)의 두 번째 컴필레이션 앨범 [Self Made Vol. 2] 수록곡 ‘Bury Me A G’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If I die tonight I pray I get buried in clean drawers
만약 내가 오늘밤 죽는다면 깨끗하게 차려 입은 채로 묻히길 기도하지
Line us all up, just bury me with my dawgs
우리의 묘를 나란히 정렬해줘, 내가 피를 나눈 친구들과 함께 묻힐 수 있게 말이야
즉 위험천만한 환경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갱스터로 자신을 상정한 래퍼가 ‘내가 (언제) 죽는다면’이라는 가정을 통해 가사의 비장미를 강조하는 식이다. 이러한 갱스터 랩의 단골 테마를 가져온 빈지노는 그들을 직접 흉내 내기보다는 테마의 원형질만을 빌려와 자신의 현실에 대입시켜 응용한다. 총, 피, 전우 대신 물감, 말보로, 엄마가 등장하는 것이다. 빈지노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갱스터 랩의 단골 테마가 한 20대 래퍼에 의해 대한민국에서 ‘로컬라이즈’되는 광경은 확실히 흥미롭다. 물론 이 같은 관점을 제쳐두더라도 ‘If I Die Tomorrow’는 가사와 사운드가 한 몸이 되어 기승전결의 뭉클한 드라마를 펼쳐내는 빼어난 싱글이다.
이 앨범과 관련해 또 하나 생각해볼 수 있는 화두는 바로 ‘힙합의 대중화’다. 이 앨범은 랩의 ‘수준’과 카타르시스를 잃지 않으면서도 일관되고 질 좋은 프로덕션과 각종 지루하지 않은 장치를 포섭하며 대중가요와 팝 팬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굳이 힙합을 대중화해야겠다면 이 앨범이 좋은 참고사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빈지노는 기대를 이어간다.
대중음악평론가이자 문화기획자.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흑인음악을 정체성으로 여기고 90년대 맑은 가요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한국 힙합, 열정의 발자취], [힙합, 우리시대의 클래식]이 있고, 역서로 [제이지 스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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