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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샴푸의 요정' (1990)

"미용주식회사가 있다. 아시아 굴지의
미용주식회사가 있다. 그리고
우리들에겐 요정이 있다. 현존하는 유일한 요정
매일 저녁 여덟 시 반 티브이 화면을 찢으며
우리 곁에 날아오는 샴푸의 요정. 그녀는 15초 동안 지껄이고
캄캄한 화면 뒤로 사라진다. 여덟 시 반,
매일 저녁 여덟 시 반에는 그녀가
출연하는 광고가 있다. 기다려 주세요."
-장정일 詩 ‘샴푸의 요정’ 중에서

단막극, 그것도 문학을 기반으로 한 단막극. 지금이야 몹시 이례적인 특집으로 기획되지만 어린 시절에는 연속극만큼 그저 TV를 켜면 만나는 일상적인 프로그램의 형태였다. 단막극이라니, 그것도 책의 재구성이라니. 머리와 가슴에 그 시절의 기억이 조각의 형태로나마 남아 있는데도, 너무 멀리 와 버렸는지 오늘의 사고방식으로 이해하자니 굉장히 진보적인 편성으로 느껴진다. 기록의 일부를 뒤져보자. [샴푸의 요정]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1988년 10월 9일 방송된 제226회 ‘베스트셀러 극장’이다. 연출 황인뢰, 극본 주찬옥, 출연 채시라 홍학표 윤석화 이효정. 샴푸 광고에 빠진, 즉 샴푸 광고에 등장하는 여성(즉 ‘샴푸의 요정’)에 빠진 한 청년을 통해 현대의 자본주의, 대중매체, 물질주의 등을 비판하고 거기 매몰된 현대인의 상실감과 인간 소외를 돌아보는 작품이다. 그리고 산문에 가까운 장정일의 시 ‘샴푸의 요정’을 모티브로 해 재구성한 내용이다.

1 샴푸의 요정 빛과소금 듣기 가사 보기 앨범 보기 뮤직비디오 보기 재생목록에 담기 MP3 BGM

남자의 이름은 현재, 샴푸 광고 모델은 애리. 미대를 졸업한 백수 현재는 샴푸 광고에 넋이 나가 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광고회사에 취직하게 되자 어찌어찌 ‘샴푸의 요정’ 애리랑 엮이고, 집착에 사로잡혀 그녀를 좇는다. 여기까진 뭔가 좀 살벌한 진행이다. 그러나 결국은 애리가 현재의 진가를 깨닫게 되면서 사랑을 이루는 해피엔딩. 작품은 1980년대 후반 만들어졌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이후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1990년대 트랜디 드라마를 보는 것만 같다. 그 시절의 젊은 배우가 주연한 이런저런 미니 시리즈는 광고대행사야말로 뭔가 좀 있어 보이는 회사라는 인식을 만들어주었다. 업무를 지휘하는 한편 여사원과 사랑을 꽃피우는 무슨무슨 실장님이 가장 멋진 직급이 됐다. 게다가 남자주인공은 일종의 스토커인데, 당시엔 이런 말이 없었을 테지만 사회가 서서히 심각성을 인지하기 시작하면서, 캐릭터를 설정하는 작가와 연출가에게는 퍽 매력적이고 현실적인 정신적 질환으로 부상했을 것이다. 종합하자면 결국 1980년대 후반의 베스트셀러 극장 [샴푸의 요정]은 그럭저럭 시대를 앞서나간 드라마로 보인다. 그리고 이 신선한 발상에는 당연히 그만큼 신선한 노래가 필요했을 것이다. 거기서 흘렀던 노래가 ‘샴푸의 요정’이다.

노래를 만든 이는 장기호로, 그는 박성식, 김현식, 김종진, 전태관과 함께 봄여름가을겨울에서 활동하다가 이후 박성식과 함께 1988년 사랑과 평화로 이적했다. 1988년 3집에 참여하면서 사랑과 평화의 일원으로 첫 활동을 시작한 후, 드라마 제작국으로부터 의뢰를 받고 만든 ‘샴푸의 요정’을 이듬해 4집 B사이드 첫 곡으로 공식 발표하게 된다. 드라마를 통해 회자되어 서서히 반응을 얻은 노래는 곧 장기호와 박성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거듭난다. 둘은 사랑과 평화에서 나온 뒤 기타리스트 한경훈을 받아들여 1990년 빛과 소금이라는 새 이름으로 데뷔 앨범을 발표하면서 ‘샴푸의 요정’을 다시 수록했다. 이후 라디오가 본격적으로 흡수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샴푸의 요정’을 빛과 소금의 노래로 기억하게 되었다.

앨범명
1집 빛과소금 Vol.1
아티스트 및 발매일
빛과소금 | 1990.03
타이틀곡
샴푸의 요정
앨범설명

봄여름가을겨울과 사랑과 평화에서 함께 활동했던 장기호(보컬/베이스)와 박성식(보컬/건반)이 한경훈(보컬/기타)을 영입하여 결성한 빛과 소금이 1990년에 발표한 1집 앨범으로, 이들은 이 앨범에서 팝 재즈, 퓨전 재즈의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

똑같이 ‘샴푸 광고에 나오는 묘령의 여자’라는 소재를 가지고, 장정일의 시와 황인뢰 연출의 단막극은 몹시 시니컬하고 비판적인 분위기로 완성됐다. 반면 빛과 소금이 만든 노래의 가사는 아무도 자본주의의 허상과 고독을 상징하는 샴푸 광고 모델의 이야기라 감히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롭고 낭만적이다. 장정일이 창조하고 황인뢰가 살을 붙인 ‘황망한 사내’ 현재가 행복한 망상에 빠진 15초를 제대로 묘사하는 것처럼, 진정 TV의 환상에 말려 잠깐 정신을 잃은 것처럼 말이다. 사실 가사의 내용을 가장 잘 반영한 부분은 사실 후렴구가 터지기 직전의 잔잔한 도입부다. 장기호의 가성을 살린 후렴구 대목이 특히 부각됐지만, 그런 편중된 관심이 아쉬워질 만큼 아름답고 서정적인 대목이다.

한편 ‘샴푸의 요정’은 특수한 카테고리에 속하는 곡이다. 록 밴드의 구성을 갖추고 들려주는 노래이지만 딱히 록의 색채가 없다. 그룹의 이름도 그렇거니와 이후 박성식의 행보를 떠올리자면 CCM을 연상할 수 있지만 이런 식의 이국적인 교회 음악은 찾기 어렵다. 이는 사랑과 평화, 봄여름가을겨울 등 그들이 활동했던 밴드와 동료들이 국내 레코딩계에 막 소개하기 시작한 후, 다른 동료들과 후예들에게 유학을 부추긴 퓨전 재즈의 전형이다. 결국 빛과 소금은 노래를 구성하면서, 누군가는 배움을 꿈꿀 만큼 전에 없던 세련되고 신선한 진행을 선보였던 무리들이다. 노래의 심장으로 기억되는 갑작스러운, 그래서 인상적인 후렴구의 가성이 단적인 예다. 보컬과 멜로디가 아름답고 평화롭게 흐르는 와중에도 예측 불가의 전개로 구석구석 긴장감을 안겨주던 도입부 또한 흥미로운 발상이다. 이 낯선 짜임새를 구상한 대로 실현할 수 있었던 까닭은 기량의 연주에 있다.

‘샴푸의 요정’이 실린 빛과 소금의 1집을 뜯어 보면 그야말로 고급 연주의 실험실과 같다. ‘슬픈 인형’과 ‘그대 떠난 뒤’처럼 노래의 근본을 적당히 가져가면서도, 수록한 많은 인스트루멘탈이 연주자의 기본과 야망을 대변한다. 사실 지금의 까다로운 기준으로 매끈하게 빠졌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렇다 해도 베이스를 연주하는 장기호와 키보드를 연주하는 박성식의 의욕과 도전을 눈치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적당히 세션을 고용해 일반적인 밴드의 구성을 취하면서도, 재즈의 문법으로 다른 장비 대신 베이스와 키보드의 솔로를 특히 살리는 이색적인 균형을 이룬다. 앞서 1988년의 드라마 이야기를 했는데, 알고 보면 곡이 얼마나 오래됐는지를, 또 어떤 의도와 목적으로 시작됐던 노래였는지를 문득 나누고 싶어서였다. 빛과 소금의 장기호는 뮤지션이자 교수, 그리고 자문위원단장의 직함으로 MBC [나는 가수다]에 권위를 부여하는 현재적 인물이다. 그가 만든 대표곡 ‘샴푸의 요정’은 김진표, 이승철, 젠틀 레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가수들이 가치를 알아보고 해석하면서 전혀 낡지 않은 곡이라고 일러주었다. 노래를 만들고 부른 사람을 종종 만나고, 원곡을 재구성하는 가수들을 종종 만나는 것처럼, ‘샴푸의 요정’은 여전히 동시대적인 노래로 느껴진다. 수준 높은 연주와 참신한 발상도 높이 살 만한 부분이지만, 친근한 선율까지 제대로 챙긴 덕분에 세대 불문으로 누구나 주요 멜로디를 어렵지 않게 흥얼거린다. 배경과 기원에 대한 이해 없이도 본능적으로 아는, 그렇게 누구에게나 친숙한 곡이다. 명곡은 멀리 있지 않다.

세상을 바꾼 노래 소개

타이틀이 거창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원자폭탄으로 도시 하나를 순식간에 박살내버리거나 멀쩡한 강바닥을 파내서 생태계를 초토화시키는 정도쯤이나 되야 세상을 바꿨다고 얘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설득할 생각은 없다. 다만, 노래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투표의 작동원리와 비슷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한 장의 투표권이 공동의 지향과 만남으로써 세상을 (좋게든 나쁘게든) 바꾸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하나의 노래는 대중의 정서와 호응함으로써 한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규정하는 이정표로 우뚝 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바꾼 노래'들을 주목했다. 당초 1900년대 초반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전체를 아우르는 기획으로 준비했으나, 여러 가지 현실적인 여건의 제약으로 여기서는 1970년 이후 발표된 노래들을 시대순으로 소개하기로 했다는 점도 밝혀둔다. 더불어, 여기에 미처 소개하지 못하는 노래들은 언젠가 다른 방식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을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 드린다.

100비트 | 이민희 (웹진 '백비트' 편집인)

취미이자 직업으로 음악을 듣고 있다. 그리고 취미이자 직업으로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취미일 때 즐겁지만 직업일 때 고민되는 건 몇 년째 변함이 없다.

http://100bea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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