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딥 퍼플과 같은 밴드의 베스트 앨범을 만든다는 건 애당초 무리다. 만일 나에게 판매를 위한 딥 퍼플의 베스트 음반을 기획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면, 차라리 1968년 발매된 [Shades of Deep Purple]부터 1975년 발매된 [Come Taste the Band]까지 10장의 음반을 모아 박스세트를 만들고 말 것 같다. 그만큼 당시 딥 퍼플의 음반은 한 장 한 장이 교과서와도 같다. 물론 1980년대 중반 재결성된 딥 퍼플 역시 많은 명곡들을 만들며 지속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1970년대 딥 퍼플과는 여러모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까.
개인적으로 딥 퍼플을 처음 접한 건 [Deepest Purple]이라는 베스트 음반을 통해서였다. 중학생이었던 그때 형이 사온 이 음반은 내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우선 자켓의 뒷면에 등장하는 존 로드와 글랜 휴즈의 사진은 심령사진, 아니 심령사진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공포스런 이미지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돌아보면 그보다 훨씬 원색적이고 잔인한 아트워크들이 많지만, 어땠든 당시 어린(?) 마음으로 자켓을 들여다보던 나에겐 악몽에 시달릴 정도의 첫인상이었음을 고백한다.
자켓은 그랬고, 그렇다면 음악은? 물론 음악도 충격이었다. 형들 덕에 일찌감치 팝음악을 접했고, 또래 친구들보다는 일찍 레인보우(Rainbow)의 데뷔앨범이나, 퀸(Queen)의 베스트 음반들을 통해 록음악을 들을 수 있었지만 딥 퍼플의 ‘Speed King’의 가공할(?) 속도를 따라올 곡은 없었다. 더욱이 그때까지 들었던 음악들에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웃음소리까지 삽입되어, 세상엔 이런 음악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놀람은 잠깐, 이 한 장의 베스트 음반에 수록된 곡들로 딥 퍼플의 노예가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Smoke on the Water’, ‘Black Night’, ‘Highway Star’, ‘Fireball’이나 ‘Black Night’은 물론이고, 당시 보컬리스트가 교체되었던 것도 모르고 들었던 ‘Burn’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곡 빼 놓기 어려운 멋진 곡들로 가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월간팝송’의 애독자 코너에 누군가 ‘Child In Time’이라는 곡을 자신의 베스트로 꼽아놓은 걸 봤다.
도대체 어떤 곡이기에 그렇게 입이 닳도록 칭찬을 한 걸까 궁금했지만, 요즘과 달리 당시엔 곡 제목을 알아도 음악을 들어볼 수 있는 통로는 거의 없었다. 방송국에 신청곡을 하거나, 음반을 사는 일 외에는 방법이 없던 시대기 때문이다. 물론 음악다방에서 신청곡을 해서 들을 수도 있었겠지만, 중학생이 들어갈 수는 없던 곳이었고. 마침 다행이었던 건 친구의 형이 당시 대학생이었고, 아르바이트로 음악다방의 DJ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친구의 집에는 생전 처음 보는 음반들이 단색의 소박한 슬리브를 걸치고 나를 유혹했다. 그 복사판, 소위 ‘빽판’들은 나를 또 한 번 다른 세계로 인도했다. 친구네 형 몰래 ‘Child in Time’이 수록되었단 이유만으로 모노톤이었지만 어쨌거나 러쉬모어 국립공원의 ‘큰 바위 얼굴’을 연상시키는 위압감의 자켓부터 심상치 않았던 음반 [In Rock]을 빌려와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서 듣고 또 들었다. 그리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는 딥 퍼플에 대한 첫 느낌을 다시금 확인했다.
그리고, 결국 [In Rock]은 당시 오아시스 레코드를 통해 국내 정식으로 라이선스 발매되었다. 그래서 형을 마구 졸랐다. 깨끗한 음질의 음반을 어서 사달라고. 그런데, 형의 얘기로는 라이선스 음반에 ‘Child in Time’이 없다는 것이다. 난 형이 나에게 음반을 사주기 싫어서 핑계를 대는 줄 알고 부득부득 대들었다. 최고의 명곡이고 가장 긴 곡이 빠질 리가 있냐고... 결과는 뭐 형을 둔 독자들이라면 잘 알겠지만, 몇 대 맞는 걸로 결론이 났다. 분을 삭이지 못하고 결국 레코드 가게에 가서 음반을 확인했는데, 형 말이 맞았다. 당시에 이유는 잘 몰랐지만 ‘금지곡’이어서 빠졌다는 얘기도 들었다. 개인적으로 CD와 함께 LP도 수집하고 있긴 하지만, [In Rock]은 라이선스 LP로 가지고 있지 않다. 바로 위의 그 이유들 때문이다.
현지 시간으로 지난 7월 16일 딥 퍼플(Deep Purple)의 원년멤버인 키보디스트 존 로드(Jon Lord)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알려져 있다시피 존 로드는 기타리스트 리치 블랙모어(Richie Blackmore)와 함께 딥 퍼플 사운드의 구조를 만들며 하드록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던 인물이다. 그는 정식으로 클래식 교육을 받아 클래식과 록을 접목하려는 시도를 ‘April’을 비롯한 많은 곡을 통해 했고, [Concerto For Group And Orchestra]에서는 본 공연을 시작하기 전 ‘Hush’를 들으며 클래식에 의해 록 음악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확인하러 온 관객들에게 기립박수를 받아내기도 했다. 또 하몬드 오르간을 록 사운드에 효과적으로 배치하며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던 하드록 밴드들의 필수악기로 만들었다. 앞서 교과서라는 이야기를 언급하기도 했지만, 존 로드의 연주들이야 말로 인접 밴드들에 있어서는 최고의 교과서가 되었음에 분명하다. 그의 죽음 앞에 이어지고 있는 많은 이들의 추도 행렬은 이러한 선구자와 같은 활동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딥 퍼플을 대표하는 곡들은 앞서 나열한 몇몇 곡들 이외에도 무수하게 많지만, 존 로드가 세상을 떠난 후 꺼내 듣는 음악들은 다소 느린 음악들이다. 도노반의 곡을 리메이크했던 초기 넘버 ‘Lalena’나, 이후 이안 길런의 솔로 음반에도 제프 힐리가 세상을 떠나기 전 울부짖는 기타 연주를 선보이기도 했던 ‘When a Blind Man Cries’에서 3기 딥 퍼플의 명곡 ‘Mistreated’, 또 1984년 재결성 이후 발표했던 ‘Wasted Sunsets’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있어서 가정이란 불가능하고 또 불필요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존 로드가 없었다면 딥 퍼플의 사운드는 아니 하드록의 사운드는 지금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영전에 리치 블랙모어가 했던 “이제 완전한 딥 퍼플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못한다.”는 이야기 역시 그와 뜻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존 로드는 가고 그의 손길은 음악으로 남았다. 그로 인해, 그 음악으로 인해 우린 행복했고, 또 앞으로 행복할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음악을 심하게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내가 좋아하는 어떤 뮤지션/밴드의 특정한 어떤 노래/음반이 도대체 왜 누려 마땅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지 분통 혹은 분노 혹은 불만을 터뜨려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지극한 팬심으로 그(녀) 혹은 그(녀)들의 대표곡/대표작에 순위를 매겨가며 폐인놀이를 즐겨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예컨대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High Fidelity)]의, 한심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낙오자 삼총사처럼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참에 대놓고 그 짓을 해보기로 했다. 이름하여 'Custom Best Album'. 내가 사랑하는 뮤지션/밴드를 모셔놓고 그(녀)/그(녀)들의 '베스트 앨범'을 온전히 내 손으로 꾸며보는 것이다.
이건 어쩌면,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시대의 요청이다. 전 세대의 뮤지션/밴드에 접근하는 가장 손쉬운(그리고 경제적인) 방법이 베스트 앨범을 섭렵하는 것이라면,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그(녀)/그(녀)들의 정수를 누군가에게 소개하는 일만큼 즐거운 일도 없을 테니까. 역사적 의미와 개인적 취향을 적절히 조절해 선곡하는 것이 핵심임은 물론,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게다가 이제는 공테이프/공CD를 데크에 걸고 이 앨범 저 앨범을 뒤적이는 푸닥거리도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음악을 파일 단위로 재생하는 시대의 이기가 커스텀 편집앨범의 신천지를 진작에 열어젖혔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이번 기회에 여러분도 '나만의 커스텀 베스트 앨범' 한번 만들어보시길 바란다.
1980년대 중반부터 대전에서 방송 게스트, 외부 기고 등 소극적으로 해왔던 음악활동. 2004년 KTX가 처음 개통한 날 부터 서울에 있는 핫뮤직에 출퇴근을 하며 정식으로 직업이 되었다. 때문에 현재 휴간 중이긴 하지만 '핫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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