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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키보드만 남았을 뿐

잘 알려진 대로 존 로드(Jon Lord)는 이 시점부터 딥 퍼플의 함장 역할이 아니다. 그가 딥 퍼플을 견인했던 시기는 클래식과 록을 접목하던 1기 시절과 리치 블랙모어(Ritchie Blackmore)와 치열한 헤게모니 전투를 벌이던 2기 시절이다. 2기는 [In Rock], [Fireball], [Machine Head], [Made In Japan] 등 하드 록 역사를 뒤흔든 명반들이 쏟아지던 시기다. 그러나 세상사 모든 일이 그러하듯, 난관이 닥쳐왔다. 보컬리스트 이언 길런(Ian Gillan), 베이시스트 로저 글로버(Roger Glover)이 탈퇴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조짐이자 위기였다. 뭔가 달라져야만 했던 상황이었다.

앨범명
8집 Burn
아티스트 및 발매일
Deep Purple | 1974.02.15
타이틀곡
Burn
앨범설명

“Machine Head”, “Burn”, “In Rock”에 이은 또 하나의 딥 퍼플 걸작 앨범 스페셜 에디션 출시!!! 73년, 데이빗 커버데일과 글렌 휴즈가 참여한 가운데 이른바 MK 3 라인업으로 발표한 첫 번째 음반으로 미국과 영국 챠트 톱 10에 각각 진입..

이 음반 [Burn]이 공개된 것은 1974년이다. 놀랍게도 밴드의 목소리는 무명이었던 데이비드 커버데일(David Coverdale)과 베이시스트 글렌 휴즈(Glen Hughes)로 대체되었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음악 스타일의 변혁이었다. 그룹은 기존의 하드 록 사운드에 블루스와 펑크(funk), 소울을 뒤섞는 모험을 감행한다. 이것은 존 로드의 비중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 그룹의 핵은 명실상부하게 리치 블랙모어였다.

그러나 존 로드의 존재감이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오프닝 트랙 ‘Burn’을 들어보면 확인할 수 있다. 프로그레시브에서 영향 받은 것이 틀림없는 전개는 존 로드의 입김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리는 증거였다. 중저음의 커버데일과 고음의 휴즈가 겹쳐지고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파장은 색다른 맛을 전달하는데 이는 이언 길런의 느낌과는 분명히 일별되는 것이기도 했다. 딥 퍼플 최고의 명곡 중 하나를 주조한 원동력은 그 배후에 흐르던 멤버들 사이의 묘한 기류와 긴장감이었다.

1 Burn Deep Purple 듣기 가사 보기 앨범 보기 뮤직비디오 보기 재생목록에 담기 MP3 BGM

그룹이 갈아입은 옷이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곡은 ‘Might Just Take Your Life’이다. 이건 완연한 블루스 록이다. 당연하게도 끈적끈적하고 축축하다. 스트레이트한 하드 록을 선호했던 기존 팬들은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밴드의 선회를 지지하는 쪽을 택했다. 그에는 보다 점성이 강한 ‘Mistreated’의 공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이 곡은 잉베이 맘스틴(Yngwie Malmsteen)이 [Inspiration]에서 꽤 멋지게 리메이크 한 바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원곡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마치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을 같은 종목으로 격침하기라도 할 것처럼, 꽉 잡힌 사운드로 이내 주파수의 공명을 창조해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무엇보다 이 곡의 매력은 다 채우려 하지 않는 ‘비워냄의 미학’이다. 간혹 곡 하나에 모든 것을 구겨 넣으려 시도하는 종합주의자의 음악을 듣게 되는데, 그들은 필히 이 곡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이 음반에서 어떤 곡을 가장 좋아하는가? 사실 이건 답이 정해진 문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전술한 트랙에서 두 곡을 고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의를 제기할 마음은 없다. 다만 하나를 추가하고 싶을 뿐이다. 바로 마지막에 실린 인스트루멘틀 ‘“A” 200’이다. 이 곡은 블루스 록의 흐름 속에서 몰래 피어난 앨범의 또 다른 하이라이트이자 존 로드의 신시사이저가 빛을 발하는 스페이스 록 오페라이다. 역시 공백을 소중히 남겨둔 채 곡은 서서히 물러간다.

1 'A' 200 Deep Purple 듣기 가사 보기 앨범 보기 뮤직비디오 보기 재생목록에 담기 MP3 BGM

뭔가 정돈되지 못한 채 꾸려진 라인업이었지만, 그들의 첫 행보는 범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체제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새로 짜인 5인조가 함께 활동한 것은 다음 앨범 [Stormbringer]까지였다. 이후 리치가 탈퇴했고, 1976년 밴드는 해산을 맞게 된다. 하지만, [Burn]이 남긴 자취는 깊고 길었다. 촛불 다섯 개로 점화된 작은 불꽃이 하드 록과 아트 록, 블루스를 넘어 헤비메탈과 재즈에까지 이르렀으니 말이다. 지금 재킷을 본다. 사후적 착각의 결과물이지만 안개 속에 싸인 촛불 다섯 개는 존의 부음을 접하고 이 음반의 리뷰를 쓰고 있는 자에겐 하나의 제의처럼 다가온다. 언젠가는 꺼져버릴 심지를 품은 초의 숙명같이, 그도 그렇게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학창시절을 지탱해주던 심지 하나가 뽑힌 아픔이다. 이제 악기와 음표만이 남았다. 어둑하다. 지금, 슬픔을 음악으로 대신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핑계임을 절실히 느낀다. 부디 그곳에서 영면하시길.

100비트 | 이경준 (웹진 '백비트' 편집인)

영문학과 철학을 전공했고 현 대중음악평론가로 활약하고 있다. 잡지 [오이뮤직], [프라우드], [브뤼트]의 필자로 있었고 현재는 웹진 '100비트' 편집위원, '보다', 매거진 [독서평설], [유레카]의 필진이다. [네이버 오늘의 뮤..

http://100bea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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