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이 발달하기 이전만 해도 빌보드 100위권 차트를 매주 볼 수 있는 정보력이 없었다. 그래서 적어도 10위권에 들어온 가수들의 후속곡이 보이지 않으면 왜 곡을 더 발표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 궁금증은 [Top Pop Singles]와 같은 빌보드 싱글의 역사를 수록한 책이나 인터넷으로 빌보드 차트를 볼 수 있게 되면서, 그들이 다른 일로 바빠서 곡을 발표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40위권 혹은 100위권 내의 히트 곡을 내지 못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사실 그렇게 사라진 가수들은 생각보다 많다. 오죽하면 채널 VH1에서 ‘최고의 원 히트 원더스’라는 제목으로 80년대만 100곡을 꼽겠는가. 이 글에서는 지면상 여성 가수들, 그 중에서 1위곡을 낸 가수만 꼽아 보았다. 1위를 기록한 시점이 기준이기 때문에 1위하기 이전에 히트한 곡이 있더라도 리스트에 올렸다. 그리고 이후에 앨범을 계속 낸 것과는 상관없이 미국 싱글 차트 기록만을 살폈다. 또 1970년부터 1990년까지만 꼽았다.
데비 분(Debby Boone)은 팻 분(Pat Boone, 팻 분은 몰라도 그가 불러 싱글 차트 1위에 올린 ‘Moody River’란 곡은 대충 알 것이다)의 셋째 딸이다. 그녀는 이미 열네 살 때 아버지, 다른 형제들과 함께 공연할 정도로 노래를 잘 불렀다. 원래는 언니와 동생 셋이서 3인조로 가스펠을 불렀으나 언니가 시집가고 동생이 대학에 들어가면서 아버지가 솔로를 준비시켰다. 영화에서 제목을 따온 앨범 [You Light Up My Life]와 싱글 ‘You Light Up My Life’는 앨범과 싱글이 동시에 천만 장 이상 팔리는 기록을 세우며 당시 하나의 신드롬이 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2008년 빌보드에서 50년간 싱글 차트에 오른 모든 곡을 심의한 결과 이 곡이 6위에 올랐다고 발표한 걸로 봐서 얼마나 대단한 인기였는지 알 수 있다. 데비는 이 한 곡으로 그래미 3개 부문 후보에 올랐으며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이후 싱글차트에서 10위는커녕 40위에도 오르지 못한다. 후속곡 ‘California’와 ‘Baby I'm Yours'란 곡이 각각 50위, 72위에 올랐을 뿐이다. 데비는 원래 좋아했던 가스펠전문가수로 돌파구를 마련한다. 작곡가 조 브룩스(Joe Brooks)는 ‘You Light Up My Life’을 원래 사랑노래로 만들었지만 데비는 신에 대한 찬가로 생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개그우먼 박지선이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나와 후렴구의 ‘라라라’ 하는 부분을 개인기로 자주 선보인 곡이다. 미니 리퍼튼(Minnie Riperton)의 경우는 일찍 고인이 되었기 때문에 이 리스트에 넣기는 좀 미안한 감이 없지 않다. 5옥타브 반이라는 음역대를 가진 미니는 데뷔 전에 이미 그 가능성을 인정받아 체스 레코드에 스카우트되었고 여러 가수들의 백업 싱어로 활동했으며 로터리 커넥션(Rotary Connection)이란 그룹의 리더로 활약하기도 했다. 1970년 첫 솔로 앨범 [Come To My Garden]을 발매했지만 상업적으로 실패하고 1972년 결혼해서 두 아이가 엄마가 되었다. 거의 은퇴한 거나 다름없던 그녀를 발견한 것은 에픽 레코드사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한 대학생이었다. 그는 부사장에게 데모 테이프를 넘겼고 그렇게 해서 앨범 [Perfect Angel]은 탄생했다. 여기 수록된 싱글 ‘Lovin' You’가 차트 1위에 오르면서 앨범은 골드를 기록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음 앨범에서 첫 번째 싱글로 발표된 ‘Inside My Love’가 76위에 올랐을 뿐 이후 단 한 곡도 100위권에 진입시키지 못한다. 더욱 안타깝게도 1979년 7월 12일 유방암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 곡은 매리 맥그리거(Mary MacGregor)의 데뷔곡이다. 매리는 10대에 밴드에서 활동했고 대학시절 공연을 하다 피터, 폴 앤 매리(Peter, Paul and Mary)의 멤버인 피터 야로우(Peter Yarrow) 눈에 뜨여 그의 솔로 앨범 [Love Songs]에 백업 싱어로 참여하게 된다. 그러다 1976년 말에 솔로 데뷔 앨범 [Torn Between Two Loves]을 내놓았고 수록된 동명의 곡을 싱글로 발표한다. 다른 애인이 생겼지만 사귀던 애인에게 그 사실을 그냥 이해하고 자기 곁에 있어줄 것을 부탁하는 이 곡은 백만 장 이상이 팔려나가며 싱글차트, AC차트, 캐나다 차트에서 1위에 올랐으며 컨트리 차트에서는 3위에, 영국에서도 5위 안에 랭크된다. 하지만 매리는 이후 이렇다 할 히트 곡을 내놓지 못한다. 1979년에 마지막으로 ‘Good Friend’가 39위에 오르며 차트와는 영원히 이별한다. 그리고 1981년에 활동을 접음으로써 데뷔 이후 5년 만에 가수 생활도 마친다. 매리는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히트한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의 삽입곡인 ‘사요나라’와 ‘Love Light’을 작곡하고 불렀다.
델마 휴스턴(Thelma Houston)은 싱글 차트에 4곡밖에 올리지 못했고 히트 곡은 이 ‘Don't Leave Me This Way’ 한 곡뿐이지만 원 히트 원더라는 말이 무색하게 아직까지도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가수다. ‘Don't Leave Me This Way’는 1976년에 발표한 그녀의 세 번째 앨범 [Any Way You Like It]에 실린 곡으로 해롤드 멜빈(Harold Melvin & The Blue Notes)이 1975년에 발표한 곡을 리메이크 한 것이다. 이 곡은 싱글 차트와 더불어 댄스 차트에서 1위를 했을 뿐만 아니라 VH1이 뽑은 역사상 최고의 댄스 음악에도 2위에 올랐고 델마는 그래미에서 최우수 R&B 여성 보컬 부문을 수상한다. 그렇지만 싱글 차트의 히트는 여기까지다. 이후 1979년 34위에 오른 ‘Saturday Night, Sunday Morning’이 최고 순위다. 하지만 R&B와 댄스 차트에서는 그럭저럭 히트 곡을 양산한다. 특히 댄스 부문은 간간히 10위권에도 히트 곡들을 올렸다.
이본느 엘리만(Yvonne Elliman)은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고등학교 밴드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클럽을 전전하며 생계수단으로 노래를 하던 그녀는 뮤지컬을 준비하던 팀 라이스(Tim Rice)와 앤드류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에게 발탁된다. 그 뮤지컬은 [Jesus Christ Superstar]였고 이본느는 막달라 마리아 역을 맡는다. 4년에 걸쳐 이 배역을 연기한 이본느는 골든 글러브 뮤지컬 최우수 여배우 부문 후보에 오르고 1971년 예수와 사랑에 빠진 마리아의 심정을 노래한 ‘I Don't Know How To Love Him’으로 미국 차트에 첫 발을 디딘다(후에 헬렌 레디(Helen Reddy)가 불러 더 크게 히트시킨다). 이본느는 ‘If I Can't Have You’ 이전에 10위권에는 들지 못했지만 ‘Love Me(#14)’와 ‘Hello Stranger(#15)’와 같은 싱글을 보유하고 있었다. 원래 이 곡을 부르기 전에 비지스(BeeGee's)가 그녀를 위해 만든 ‘How Deep Is Your Love?’를 부르기로 되어 있었지만 음반회사 사장이 반대해서 ‘If I Can't Have You’를 부르게 되었다. 이 곡이 1위한 후 3장의 싱글을 더 발표하지만 ‘Love Pains’가 34위에 오른 것을 끝으로 싱글 차트 인생은 막을 내린다. 이본느는 두 아이의 보육에 전념하기 위해 은퇴했다가 2004년 다시 음악계로 돌아왔다.
글로리아 게이너(Gloria Gaynor)는 댄스 차트에서 5곡이나 1위곡을 보유하고 있지만 연륜에 비해 싱글 차트에서의 성적은 그리 좋지 못하다(최근 싱글은 2008년에 발표되었다). ‘I Will Survive’가 발표되기 전까지 유일한 히트 곡은 9위까지 오른 ‘Never Can Say Goodbye’가 있고 통산 탑 40 히트 곡은 모두 합쳐 이 두 곡이 전부다. ‘I Will Survive’는 원래 ‘Substitute’란 곡의 B면으로 제작되었지만 DJ들이 B면을 더 좋아하면서 알려지게 되었고 급기야 1위까지 올라 지금까지 200만장 이상이 팔린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1980년 역사상 단 한 번 시상했던 그래미 디스코 부문을 수상했고 2000년 VH1이 발표한 역사상 최고의 댄스 음악 1위에 올랐다. 애인에게 버림받은 여인이 전 애인에게 “너 없이도 잘 이겨낼 수 있다”는 가사를 담고 있는 이 곡은 디스코와 여성해방의 송가로 인기를 드높였으며 아직까지도 미국에서는 종무식이나 노래방에서 인기가 높다고 한다. 로비 윌리암스(Robbie Williams)는 ‘Supreme’이란 곡에서 이 곡을 차용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진주가 고등학생 신분으로 이 곡을 소화해 자신의 가창력을 인지시켰다.
아니타 워드(Anita Ward)는 가수가 되기 전 선생님이었다. 그러다 음반 계약을 하게 되었지만 처음에 받아 든 ‘Ring My Bell’은 맘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디스코 시대에 이 곡이 돈을 벌게 해 줄 것이라고 열심히 설득했던 사장이 없었다면 어쩌면 앨범에서 빼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니타의 우려와 달리 이 곡은 미국과 영국 동시에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르며 사장의 예언을 그대로 실현해 주었다. 그녀는 이 곡의 히트 후 곧장 새 앨범 [Sweet Surrender]의 작업에 들어갔고 ‘Don't Drop My Love’를 싱글로 발표한다. 하지만 겨우 87위에 머무르고 덩달아 앨범 판매도 부진하자 원래 3장을 계약하기로 했던 음반사는 3집 앨범 녹음 도중 계약을 취소하고 만다. 결국 아니타는 음악사에서 한 곡만 히트시킨 원 히트 원더로 남게 되었다. 10여 년이 흐른 후 다시 음반을 만들지만 미국에서는 아무도 배급하려 하지 않아 다른 곳을 찾게 되었고 겨우 호주에서 유통되었지만 차트에 오르지는 못했다. 아니타는 이 앨범 발표 뒤 낳은 딸의 교육에 집중하며 음악을 한동안 멀리했다. 그러나 아이가 다 큰 지금 디스코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위해 ‘Ring My Bell’을 부르고 있다. 다이나믹 듀오는 2004년 1집 [Taxi Driver]에서 이 곡을 샘플링 한 ‘Ring My Bell’을 발표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토니 바실(Tony Basil)의 첫 싱글은 단편영화 [Breakaway]를 위해 만든 ‘Breakaway’였다. 이후 [Saturday Night Live]에서 스윙 재즈를 불러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여기서 인지도를 얻어 솔로 공연이 매진되는 사태를 맞이하며 1982년 ‘Mickey’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곡은 원래 영국 밴드 래이시(Racey)의 ‘Kitty’라는 곡을 리메이크한 것이다. 토니는 제목을 바꾸고 “Oh! Mickey You're So Fine”이라는 가사를 더 첨가했다. 결과는 대성공. 싱글은 금세 50만 장이 팔렸으며 이듬해에 200만 장이나 팔려나갔다. VH1은 이 곡을 1980년대 위대한 원 히트 원더스 중 5위로 꼽았다. 하지만 토니는 이후 한 장의 앨범을 더 내고 음악계와는 담을 쌓는다. 토니는 음악보다는 사실 안무가로 더 유명하다. 거기에 배우, 제작자, 영화감독, 댄서 등의 다양한 직함이 그녀를 수식한다. ‘Mickey’의 안무도 본인이 직접 만들었으며 감독까지 맡아 했을 정도다. 그녀가 안무를 짠 영화는 너무 많아 셀 수도 없다. 우리가 아는 영화로는 [어메리칸 그래피니(American Graffiti)], [더 로즈(The Rose)], [금발이 너무해(Legally Blonde)] 등이 있다.
지난 5월에 국내에 왔었던 보니 타일러(Bonnie Tyler)는 오디션 가요제 출신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슈퍼마켓 계산원으로 일하던 그녀는 오디션 대회에 나가 매리 홉킨스(Mary Hopkins)의 ‘Those Were The Days’를 불러 2등을 차지하고 밴드의 보컬로 뽑힌다. 그 후 활동을 하다 성대에 혹이 생겨 제거하는 수술을 받고 쉬다 목을 혹사하는 일이 발생해 목소리가 엄청나게 허스키하게 되어 버렸다. 당시에는 가수 생명이 끝나는 줄 알았지만 1977년 발표한 ‘It's A Heartache’이 크게 히트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후 지지부진한 활동을 보인다. RCA의 매니지먼트가 맘에 들지 않았던 그녀는 더 록 스타일로 이끌어 줄 회사를 찾는다. 계약이 끝나자마자 콜롬비아로 옮기고 짐 스타인멘(Jim Steinmen)의 프로듀싱 아래 1983년 [Faster Than The Speed of Night]을 발표한다. 여기 수록된 파워 발라드 ‘Total Eclipse of The Heart’는 전 세계적으로 히트하며 그녀에게 그래미 상 후보가 되도록 해주었고 007의 주제가 요청도 받는다. 하지만 이후 다시 그녀는 히트 곡 가뭄에 빠진다. 영화 [풋루즈(Footloose)]의 삽입곡인 ‘Holding Out For A Hero(#34)’가 영국에서 5위에 오르고 국내에서 많이 알려졌을 뿐이다. 보니는 2005년까지 계속 정규 앨범을 발표하지만 1986년을 끝으로 100위권에 한 곡도 올리지 못한다.
데니스 윌리암스(Deniece Williams)는 대학에서 간호사를 전공했지만 구멍 나는 학점을 막을 길이 없어 학교를 포기하고 클럽에서 아르바이트로 노래를 부르며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백업 싱어로 5년간 활동하다 어스, 윈드 앤 파이어(Earth, Wind & Fire)의 모리스 화이트(Maurice White)와 팀을 이뤄 데뷔 앨범을 발표한다. 그리고 1978년에는 자니 마티스(Johnny Mathis)와 듀엣으로 ‘Too Much, Too Little, Too Late’으로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른다. 데니스는 이후 자니 마티스와 상당히 많은 듀엣 곡을 부른다. 1982년 ‘It's Gonna Take A Miracle’을 10위에 올린 데니스는 84년에 발표한 앨범 [Let's Hear It For The Boy]에서 동명의 타이틀곡으로 1위에 오른다. 이 곡은 영화 [풋루즈(Footloose)]에도 삽입되어 더 높은 인기를 누렸으며 앨범은 100만장이 팔려나갔다. 하지만 싱글 차트에서의 히트는 여기서 막을 내린다. 데니스는 이후 해마다 앨범을 발표했지만 전혀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오히려 어스, 윈드 앤 파이어의 필립 베일리(Philip Bailey)와 시작한 가스펠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 14번에 걸쳐 그래미 후보에 오르고 4번이나 수상한다.
이 글이 미국 싱글 차트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킴 와일드(Kim Wilde)의 경우는 좀 억울할 수 있다. 영국인인데다 데뷔곡인 ‘Kids in America’는 미국에서 25위 밖에 오르지 못했지만 영국에서는 폭발적인 히트를 기록하며 2위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거기에 80년대에는 17곡이나 영국 싱글 차트의 40위권에 올리며 여성 솔로로서는 최고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녀가 미국에서 1위 한 곡은 다이애나 로스(Diana Ross)가 활약한 3인조 여성 그룹 슈프림스(The Supremes)의 1966년 싱글 차트 1위곡인 ‘You Keep Me Hangin' On’이다. 오리지널이 가지고 있던 모타운 사운드를 제거하고 80년대 강력한 뉴웨이브로 무장한 이 곡은 샘플링 된 드럼과 각종 효과음으로 뉴웨이브 사운드의 진일보를 알리며 U2의 ‘With or Without You’를 정상에서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미국 싱글 차트 기록은 이 두 곡이 전부다. 이후 아기를 가진 후 대학에 등록해 원예학을 배운 킴은 방송국과의 협의로 여러 차례 원예에 대한 시리즈를 TV프로그램으로 방영해 본국에서 원예 전문가로도 유명하다. 2011년에는 12번째 정규 앨범을 발표했다.
1990년대의 가장 논쟁적인 가수 중의 한 명인 시너드 오코너(Sinead O'connor)는 1992년 10월 미국의 [Saturday Night Live]에 나와 교황의 사진을 찢은 사건으로 유명하다. 외모의 성적소비를 반대해 머리를 짧게 깎은 시너드는 카톨릭의 성적 학대에 대한 유감으로 자신의 의견을 이렇게 표출했고 이 사건은 1990년대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사건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과감함과 실천력으로 평소 아동학대, 여성권리, 성적 학대 등에 관심을 기울인 그녀지만 미국 싱글 차트에서만큼은 원 히트 원더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4주간이나 1위를 차지했던 ‘Nothing Compares 2 U’는 원래 프린스가 펑크 그룹 더 패밀리(The Family)에게 준 곡이었으나 싱글로 발표되지 않아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곡이었다. 하지만 시너드의 목소리로 리메이크 된 이 곡은 미국을 비롯한 10개국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싱글은 1990년 한 해에 3번째로 많이 팔린 곡으로 기록되었고 1990년대를 통틀어서는 83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프린스도 뒤늦게 자신의 컴필레이션 앨범에 이 곡을 싣기 시작했다. 뮤직비디오 역시 호평을 받아 MTV 6개 부문 후보에 올라 3개 부문을 수상했다. 올해 새 앨범을 발표한 시너드는 1990년 ‘The Emperor's New Clothes’가 60위에 오른 것을 끝으로 빌보드 싱글과는 20년 넘게 거리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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