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흑인음악에 대한 글을 쓰고 힙합에 관한 책을 쓰다 보니 그동안 내가 1980-90년대 맑은 가요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외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다음뮤직에 게재한 ‘윤종신 인터뷰’나 ‘한국 발라드의 가장 찌질한 순간 톱10’ 등의 기사에서 알 수 있듯 나란 남자 여린 남자. 그 후 본의 맞게 윤종신 전담마크맨 이미지가 굳었는지 커스텀 베스트 또한 윤종신으로 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잠시 고민했으나 나는 후보단일화 방식을 수용한 노무현 대통령 스타일로 흔쾌하고 즐겁게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먼저 밝혀두건대 정규앨범 13장과 각종 프로젝트 활동 및 참여곡을 대상으로 했다. 작사나 작곡을 했으나 직접 부르지 않은 곡은 제외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히트곡, 혹은 잘 알려진 곡이라는 가치를 배제하고 철저히 나 개인의 취향과 선호에 집중했다는 점이다. 나의 이 리스트가 독자들에 의해 어떻게 더 채워질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 '돌아오던 날'. '도피'. 어느 예비군의 편지'는 온라인 서비스 불가 음원임을 양해바랍니다.
‘이층집 소녀’는 그 여유로운 아날로그 감성이 좋았다. 지나간 추억을 회상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흥을 잃지 않고 있고, 어쿠스틱 기타와 하모니카는 물론 후반부의 애드립도 자주 흥얼거리던 기억이 난다. 훗날 12집에 수록된 ‘해변의 추억 (Day Ver.)’을 듣고는 이 곡의 편곡이 겹쳐지기도 했다. ‘여자친구’ 역시 설레는 곡이다. 전주를 들을 때마다 늘 가슴이 뛴다.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점은 같지만 이지형의 ‘겨울, 밤’이 쓸쓸함의 정서라면 이 곡은 대학 초년생의 풋풋함을 지니고 있다.
‘너의 어머니’는 요즘 들어 다시 자주 들었다. 여자친구의 어머님과 독대한 자리에서 점점 움츠러드는 남자의 상황을 그린 이 곡을 들으며 ‘결혼과 관련한 한국 보통 남성의 패배적 상황’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곡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돌직구를 던지는 대신 듣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 가사 역시 인상적인데, ‘만족하신 듯 했어 고개 떨군 나를 보시며 / 나보다 더 널 사랑하신 것 같아’라는 구절은 행여 나의 미래가 되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도 조금은 있다.
입대를 앞둔 윤종신이 자신의 이십대를 돌아보며 만든 ‘나의 이십대’는 가사에 담긴 그 구체적 상황들이 나에게 해당되지 않음에도 이십대 중후반 즈음의 나를 출렁이게 한 적이 있다. 말 많고 탈 많았던, 그러나 치열했으며 마냥 후회할 수만은 없는 시간들이라는 점에서 아마 윤종신의 이십대와 나의 이십대가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제대 후 발표한 7집에 수록된 ‘돌아오던 날’은 윤종신의 모든 곡을 통틀어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는 노래 중 하나다. 원제가 ‘제대하던 날’이었다고 알려진 이 곡은 애타게 기다리던 제대 날에도 기쁨을 맛보기는커녕 옛사랑의 집 앞에서 서성이는 한 남자의 모습을 쓸쓸하게 그려낸다. ‘배웅’이 숭고하다면 이 곡은 처연함으로 허우적댄다. 같은 앨범에 담긴 ‘도피’는 아마 이별노래를 통틀어 가장 극단적인 설정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헤어진 연인을 잊기 위해 남자는 외국으로 도피한다. 그 동양적인 선율이 좋아 참 많이도 들었다.
‘비어 있는 내 맞은편과 더 이상은 할 말 없어서 모처럼 나온 내 발길 돌리네’라는 희대의 명가사를 남긴 ‘모처럼’, 그리고 나와의 인터뷰에서 윤종신 본인은 ‘지금 와서 보면 좀 유치하다’고 했으나 나에게는 아직도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로 남아 있는 ‘잘했어요’는 8집을 대표하는 슬픈 노래들이다. 그런가하면 ‘9월’과 고민하다 선택한 ‘바다이야기’는 ‘팥빙수’와 ‘고속도로 로망스’가 버티고 있는 9집에서 묵묵히 슬픔을 떠받치고 있는 고독한 에이스다.
10집으로 넘어오면, 10집이 기대만큼의 반응을 얻지 못한 건 참 아쉬운 일이다. 윤종신의 가사는 절정에 달해 있었고(혹은 절정을 이어갔고), 정석원의 프로듀싱은 앨범에 축복을 내렸다. 그중 ‘너에게 간다’는 실제로 윤종신의 홈페이지에서 실시한 설문에서 그의 모든 싱글을 통틀어 1위로 뽑히기도 했다. 나 역시 동의한다. ‘너에게 간다’는 가히 2000년대 한국 대중가요를 대표하는 팝 싱글이라고 할만하다. 영화 ‘4월이야기’가 그렇듯 제대로 된 상황이 시작도 되기 전에 끝나버리는 가사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여운을 주고, 정석원의 말에 의하면 ‘제대로 배운 놈은 절대 안 쓰는’ 코드진행을 택한 윤종신의 멜로디는 한순간에 귀에 와 닿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사가 품은 정서를 300% 구현해낸 황성제의 편곡이 신의 한수다.
‘나의 안부’는 서두에 언급한 기획기사 ‘한국 발라드의 가장 찌질한 순간 톱10’에서 1위로 꼽은 곡이니 그 글을 읽어주기를 바라고, ‘消耗(Somo)’의 경우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로 빙의한 정석원의 프로듀싱이 인상적이다. 정석원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동네 한바퀴’는 가히 정석원표 발라드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매품으로는 김형중이 부른 공일오비의 ‘받은만큼만 해주기’가 있다. 그러나 앨범 전체로 보면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던 11집에서 마지막 곡 ‘나에게 하는 격려’는 사람들이 꼭 들어봤으면 한다. 나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던 날 이 노래를 들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김광석에게 ‘서른 즈음에’가 있다면 윤종신에게는 ‘서른 너머.. 집으로 가는 길’이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세월 시리즈로 12집의 ‘Walking Man'과 13집의 ’나이‘가 있다. 이 ’세월 트릴로지‘는 어쩌면 40대를 넘기며 변함없이 창작욕을 불태우고 있는 음악가이자 생활인 윤종신의 가장 절절한 진심일지 모르겠다. 실제로 ‘Walking Man'과 ’나이‘는 과거보다 뛰어난 이별노래가 많이 보이지 않는 12집과 13집에서 둘 다 각각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정규 앨범 외에도 꼽고 싶은 곡이 많다. ‘이등병의 편지’를 모티브로 삼아 만든 ‘어느 예비군의 편지’는 (지금은 끝났지만) 향방 훈련을 받으러갈 때마다 늘 듣곤 했다. 그 때마다 단 한번 뿐인 겁 없는 계절이 이렇게 점점 저물어가고 있다는 걸 느끼며 아저씨모드를 준비하고는 했는데, 다행히 아직도 문턱을 건너지 않은 채 준비 중에 있다(고 스스로는 생각한다). [연애소설 OST]에 수록된 ‘몇년이 흘러’는 지난 2010년 12월31일에 있었던 윤종신의 콘서트에서 배경음악으로 내내 흘렀던 기억이 난다. 조동희가 작사하고 박용준이 작곡하고 윤종신이 부른, 참 좋은 조합의 노래다.
지금 생각하면 좀 오그라들지만 실제로 고백에 앞서 반복해 들으며 마음을 쓰다듬고 또 고백에 활용했던 ‘고백을 앞두고’, 윤종신의 음역대를 제대로 활용하며 아이러니하게도 최근을 통틀어 윤종신의 가장 훌륭한 발라드가 되어버린 공일오비의 ‘1월부터 6월까지’, 그리고 윤종신 본인도 좋아하는 곡이라고 스스로 밝힌 바 있고 나 역시 좋아해 현재의 핸드폰 컬러링으로 설정해둔 신치림의 ‘너랑 왔던’을 끝으로 이 긴 글을 마친다. 유명하고 훌륭한데 왜 이 곡은 없냐는 볼멘소리도 물론 좋지만 내가 그랬듯 ‘당신만의 명곡’이 알고 싶다. 나는 궁금하다. 윤종신의 어떤 노래가 당신을 자라게 했는지.
음악을 심하게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내가 좋아하는 어떤 뮤지션/밴드의 특정한 어떤 노래/음반이 도대체 왜 누려 마땅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지 분통 혹은 분노 혹은 불만을 터뜨려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지극한 팬심으로 그(녀) 혹은 그(녀)들의 대표곡/대표작에 순위를 매겨가며 폐인놀이를 즐겨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예컨대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High Fidelity)]의, 한심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낙오자 삼총사처럼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참에 대놓고 그 짓을 해보기로 했다. 이름하여 'Custom Best Album'. 내가 사랑하는 뮤지션/밴드를 모셔놓고 그(녀)/그(녀)들의 '베스트 앨범'을 온전히 내 손으로 꾸며보는 것이다.
이건 어쩌면,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시대의 요청이다. 전 세대의 뮤지션/밴드에 접근하는 가장 손쉬운(그리고 경제적인) 방법이 베스트 앨범을 섭렵하는 것이라면,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그(녀)/그(녀)들의 정수를 누군가에게 소개하는 일만큼 즐거운 일도 없을 테니까. 역사적 의미와 개인적 취향을 적절히 조절해 선곡하는 것이 핵심임은 물론,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게다가 이제는 공테이프/공CD를 데크에 걸고 이 앨범 저 앨범을 뒤적이는 푸닥거리도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음악을 파일 단위로 재생하는 시대의 이기가 커스텀 편집앨범의 신천지를 진작에 열어젖혔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이번 기회에 여러분도 '나만의 커스텀 베스트 앨범' 한번 만들어보시길 바란다.
대중음악평론가이자 문화기획자.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흑인음악을 정체성으로 여기고 90년대 맑은 가요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한국 힙합, 열정의 발자취], [힙합, 우리시대의 클래식]이 있고, 역서로 [제이지 스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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