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모가 번지르르하게 리메이크하고, 이현우가 까칠하게 ‘까시나무’로 리메이크하고, 최근 나가수에서 자우림이 리메이크한 ‘가시나무’는 노래의 보편적 속성에 관한 가장 강력한 예다. 1988년 봄, 발표되자마자 이 노래는 즉각적으로 사람들로부터 보편성을 획득했다. 곧장 차트의 인기가요가 됐다는 게 아니라, 10명이든 100명이든 1000명이든 상관 없이 이 노래를 접했던 사람 모두가 노래의 운명을 알아차렸다는 얘기다. 알다시피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이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람들로/ 당신의 편한 곳 없네”에 등장하는 “당신”은 기독교의 하나님이다. 대중음악 음반의 첫 곡을 아무 거리낌없이 종교의 신앙고백으로 채울 만큼 하덕규는 달라져 있었다. [푸른 돛]과 [숲] 사이에서 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이 노래에 무릎 꿇은 건 기독교인만이 아니다. 누구도 이 노래에 설득 당하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당신”이 부처님이면 어떻고, 정말로 사랑하는 “당신”이면 어떤가? 그렇다고 이 노래의 진의가 왜곡 당하고 훼손 당했는가? 이 노래의 보편성은 멋대로 해석될 여지를 지닌 “당신”의 애매모호함에 있는 게 아니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다는, 내 속에 헛된 바람들이 많다는 자기 인식이 바로 이 노래의 힘이다. 그 인식은 이 세상 누구라도 비껴갈 수 업는 것이다. 이건 거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철학적 사유에 맞먹는 명석 판명한 인식이다. 그래서 어쨌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내가 말하는 또 다른 “당신”에게 의탁하겠는가? 하덕규는 이렇게까지 노골적이지 않았다. 하덕규는 나를 다시 바라보게끔 만드는 그 지점에서 그쳤다. 그의 의도는 개인적 신앙고백이었거나 혹은 전도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렬한 자기 인식과 넓은 여지를 지닌 “당신”의 결합으로 이 노래는 특정 종교의 차원을 넘어서는 보편성을 획득했다. 곡이 시작되면서 들리는 바람 소리와 종소리, 부서질 듯 아슬아슬한 하덕규의 목소리, 구슬피 와 닿는 멜로디, 이 모든 것이 듣는 사람의 마음을 잡아 끈다. ‘가시나무’는 세상 사람 모두를 한번쯤은 숭고하게 만드는 노래가 되었다. 또 뮤지션들이 리메이크하고 싶은 노래가 되었다.
‘가시나무’라는 강렬한 타이틀이 있음에도 [숲]은 당시나 지금이나 [푸른 돛]보다 살짝 못 미치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어쨌거나 ‘가시나무’가 기독교적 결과물이라는 걸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고 특히나 ‘천국에서 만나요~’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 ‘좋은 나라’의 해맑은 백치미는 하덕규가 퇴보했다는 증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하덕규의 변화된 내면은 [푸른 돛]과 [숲]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다. [숲]이 [푸른 돛]보다 못 미치는 평가를 받는 건 [푸른 돛]처럼 만들려다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다. [숲]은 [푸른 돛]을 쫓지 않았다. [숲]은 다른 길을 걸은 작품이다. ‘비둘기’와 ‘고양이’와 ‘매’가 등장하는 [푸른 돛]은 동물적이다. 반면에 ‘새털구름’과 ‘나무’와 ‘새봄나라에서 살던 시원한 바람’이 등장하는 [숲]은 식물적이며 자연친화적이다.
비둘기와 고양이와 매도 자연의 일부이며 숲의 일부라 말할 수 있겠지만 [푸른 돛] 노래 곳곳에 들어있는 허무와 체념과 죽음의 은유는 안식처로서의 자연과는 거리가 멀다. [푸른 돛]의 동물들은 날아가거나 활발히 움직이는 것들이고, 그 움직임은 인간 내면의 동요와 연결된다. 반면에 [숲]이 묘사하는 자연물의 모습은 ‘나무’처럼 안식을 주거나 ‘푸른 애벌레의 꿈’처럼 자유를 지향한다. ‘새날’과 ‘때’가 가리키는 미래의 어느 시점까지 같이 놓고 생각해 보면 해석은 하나로 모아진다. ‘가시나무’ 한 곡만이 아니라 [숲] 전체는 기독교적 피안과 직선 사관을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숲]은 좋은 대중음악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서정과 포크의 외피를 두르고서 마음의 동요와 긴장으로 가득한 [푸른 돛]이 비평가들의 높은 점수를 받는 건 당연한 일이다. [숲]이 그보다 조금 낮은 점수를 받는다고 해서 서운할 건 없다. [숲]은 [숲]대로의 가치가 있다. ‘가시나무’의 보편적 울림처럼 꼭 기독교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속세의 바깥을 상상하고 더 나은 관계가 펼쳐질 새로운 시간의 지평을 기대한다. 하덕규는 그 상상과 기대를 [숲]에서 구현해냈다. 그래서인지 [숲]은 [푸른 돛]보다 더 일관성을 띈다. ‘사랑일기’처럼 너무 동떨어진 느낌을 주는 곡이 [숲]에는 없다. 한없이 예쁘게만 보이는 동요 ‘새봄나라에서 살던 시원한 바람’은 그 상상과 기대 속에서 더없이 잘 어울린다.
함춘호 없이도 시인과 촌장이라는 이름을 유지했던 하덕규는 이후 본인의 이름을 걸고 [쉼](1990)과 [광야](1992)를 발표했다. ‘양 이야기’와 ‘가시면류관’, 시편 18’과 ‘그리스도’ 등등 더욱 노골적인 제목을 달면서 그는 CCM 가수로 완연히 이동했다. 물론 그 앨범들 속에도 시인과 촌장 시절 수준의 서정을 품은 좋은 노래들이 몇몇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소름 돋도록 숨 죽이며 들었던 그의 노래는 조동익과 함께 프로듀싱하고 편곡한, 언더그라운드의 연주인들이 총출동해 만든 [숲]이 마지막이었다.
타이틀이 거창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원자폭탄으로 도시 하나를 순식간에 박살내버리거나 멀쩡한 강바닥을 파내서 생태계를 초토화시키는 정도쯤이나 되야 세상을 바꿨다고 얘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설득할 생각은 없다. 다만, 노래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투표의 작동원리와 비슷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한 장의 투표권이 공동의 지향과 만남으로써 세상을 (좋게든 나쁘게든) 바꾸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하나의 노래는 대중의 정서와 호응함으로써 한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규정하는 이정표로 우뚝 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바꾼 노래'들을 주목했다. 당초 1900년대 초반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전체를 아우르는 기획으로 준비했으나, 여러 가지 현실적인 여건의 제약으로 여기서는 1970년 이후 발표된 노래들을 시대순으로 소개하기로 했다는 점도 밝혀둔다. 더불어, 여기에 미처 소개하지 못하는 노래들은 언젠가 다른 방식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을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 드린다.
몇몇 직장과 각종 알바와 잡일을 하며 보낸 10년 동안 꾸준히 음악에 관한 글도 써온 두 딸내미의 아빠. 청소년 대중음악 입문서 <주머니 속의 대중음악>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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