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분자들. 김창기가 98년에 음악 잡지 ‘서브’와의 인터뷰에서 내뱉은 이 말만큼 동물원에 대해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드는 단어도 없다. “독재 타도 투쟁의 당위성은 인정하지만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라고 느꼈”던 착한 대학생들, 비록 올바르지는 못했지만 “약하고 덜 발달된 청소년기적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던 어리숙하고 착했던 20대 청년들이 만들었던 음악. 그것이 바로 동물원의 음악이었다. “사랑이라 말하며 모든 것을 이해하는 듯/ 뜻 모를 아름다운 이야기로 속삭이던 우리”라 나지막이 노래하는 ‘잊혀지는 것’은 그래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유럽 고전 소설 어딘가에서 발췌한 듯한 청춘 시절에 대한 완벽한 통찰은 이 노래를 듣게 된 모든 젊은이를 사로잡았다. 사랑의 본질은 그런 것이었다. 투쟁은 운동권만 하는 것이었지만 사랑은, 인생에 관한 알싸한 진리는 운동권도 알고 회색분자들도 알고 백골단도 아는 것이었다. 강성한 모습은 올바른 길을 걷고자 했던 사람들이 갖춘 미덕이었지만, 평범한 삶의 진리를 알면서도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은 누구나 다 구비한 보편적 품성이었다.
회색분자들이었던 동물원은 바로 그 보편성을 노래했다. 그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김창기의 ‘잊혀지는 것’과 ‘그리움’, 유준열의 ‘말하지 못한 내 사랑’과 ‘무전여행’은 실로 그것의 결정판이었다. 기념으로 음반이나 한 장 내고 졸업하자던 친구들은 그렇게 한국 대중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되었다. 좋은 감수성이 좋은 노래를 만든다는 말, 흔히들 하는 말이다. 동물원의 1집은 바로 그 감수성 하나로 어수룩한 연주와 먹먹한 레코딩 상태를 가볍게 무마시켰다. 어떤날과 시인과 촌장에게 특유의 세계관이 있었다면 동물원 멤버들에겐 삶의 미세한 순간들을 포착해내는 예민함이 있었다. 김현철과 더불어 동물원은 80년대 말에 이 방면의 지존이었다.
그러나 2집의 타이틀 곡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가 청년 포크송 지고의 품격을 노래하기 전까지, 3집의 타이틀 곡 ‘시청앞 지하철 역에서’가 범속한 일상의 진리를 잡아내기 전까지 동물원은 어디까지나 ‘거리에서’를 만들어 부른 그룹이었다. 동물원의 첫인상은 누가 뭐래도 ‘거리에서’였다. ‘잊혀지는 것’에 대한 찬탄은 ‘거리에서’의 매력에 빠졌던 사람들에게 뜻하지 않게 주어진 숨은 그림 찾기였다. ‘거리에서’는 그만큼 강렬했다. 김광석의 역할이 지대했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목소리와 김창기가 만든 멜로디의 결합, 김창기 본인이 시인한 바 “뜰려고” 작정하고 만든 이 노래의 파괴력은 대단했다. 80년대 사람들이 흔히 ‘카페음악’이라 불렀던 낭만성 가득한 노래들, 그 계통에서 ‘거리에서’는 단박에 정점에 올랐다. “아주 낭만적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전투적인 음악만 있었다. 이것들의 중간적인 음악을 하고 싶었다”고 말한 김창기의 손에서 본의 아니게(?) 최고의 낭만성을 보유한 음악이 나온 것이다.
당시 동물원의 후원자였던 산울림의 김창완은 이대생들만 공략해도 족히 1000장은 팔릴 거라며 그룹 이름을 ‘이대생을 위한 발라드’로 짖자고 농담을 했다고 한다. ‘거리에서’가 빠졌다면 실제로 동물원 1집은 그 정도만 팔리고 말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거리에서’의 히트로 동물원은 2, 3집을 계속 만들 동력을 얻었다. ‘거리에서’는 영원히 건재할 범국민 가요로 자리잡았고 오늘도 미사리 카페촌 어딘가에서 어느 무명 통기타 가수가 목청껏 부르고 있는 노래가 되었다. 다만 미사리의 레퍼토리에 김창기가 만든 또 다른 노래, 임지훈 1집의 타이틀 곡인 ‘사랑의 썰물’도 있다는 걸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가 동물원의 여러 앨범에서 숱하게 들려준 미묘한 감성과 비교해보면 ‘거리에서’는 무척 이례적인 작품이지만, ‘거리에서’가 품고 있는 낭만성은 80년대 말에 엄연히 존재했던 어떤 기류였다. ‘사랑의 썰물’도 그랬고, 도시의 그림자들의 ‘이 어둠의 이 슬픔’도 그랬고, 여행스케치의 ‘별이 진다네’도 그랬다. 이 번들거리는 통속성의 매력은 우리가 매기는 가치보다 의외로 생명력이 강하다.
덧붙임 : '거리에서'가 대단한 노래라는 걸 가장 잘 입증한 건 98년에 개봉한 허진호 감독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일 것이다. 비 오는 저녁에 사진관을 홀로 지키던 한석규가 이 노래를 부른다. 참고로, 한석규가 차장으로 바람을 맞으며 버스를 타고 가는 장면에서는 산울림의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8월의 크리스마스] 전체는 ‘잊혀지는 것’과 같은 삶의 통찰을 보여준다.
타이틀이 거창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원자폭탄으로 도시 하나를 순식간에 박살내버리거나 멀쩡한 강바닥을 파내서 생태계를 초토화시키는 정도쯤이나 되야 세상을 바꿨다고 얘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설득할 생각은 없다. 다만, 노래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투표의 작동원리와 비슷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한 장의 투표권이 공동의 지향과 만남으로써 세상을 (좋게든 나쁘게든) 바꾸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하나의 노래는 대중의 정서와 호응함으로써 한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규정하는 이정표로 우뚝 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바꾼 노래'들을 주목했다. 당초 1900년대 초반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전체를 아우르는 기획으로 준비했으나, 여러 가지 현실적인 여건의 제약으로 여기서는 1970년 이후 발표된 노래들을 시대순으로 소개하기로 했다는 점도 밝혀둔다. 더불어, 여기에 미처 소개하지 못하는 노래들은 언젠가 다른 방식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을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 드린다.
몇몇 직장과 각종 알바와 잡일을 하며 보낸 10년 동안 꾸준히 음악에 관한 글도 써온 두 딸내미의 아빠. 청소년 대중음악 입문서 <주머니 속의 대중음악>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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