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애의 음악은 때때로 ‘극’처럼 들린다. 연극 무대에서 오래 활동하던 경험 때문이기도 할 텐데, 하여간 한영애는 단조롭게 멜로디를 타는 일이 절대로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과장되거나 씩씩한 발성을 터뜨리는 식의 예측 가능한 유형은 아니고, 배역에 대한 해석을 즐기는 타고 난 연기자라 말하는 게 좀 더 적당할 것 같다. 일례로 한영애는 폭이 좁은 멜로디를, 허스키한 목소리를 활용해 풍요로운 음악으로 만드는 이상한 능력이 있다. 한편 누군가는 한영애를 두고 무당이 떠오른다고 말할 만큼, 때때로 리듬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마치 주문을 외우는 것 같다.
이렇듯 한영애는 선율과 박자를 마음껏 주무르는 일을 기본으로 하면서, 거기에 종종 여백을 두기도 한다. 이 같은 특징이 가장 잘 살아 있는 노래로 ‘누구 없소’와 ‘말도 안돼’를 꼽을 수 있는데, 전자는 여유라는 여백, 후자는 재치라는 여백이 두드러지는 노래다. 참고로 1988년의 ‘누구 없소’는 윤명운이 작곡한 곡, 1993년의 ‘말도 안돼’는 첫 자작곡이다. 그래서 ‘누구 없소’는 더욱 특별하다. 그건 마치 한영애만 입을 수 있는 옷 같다. 아무리 들어도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스타일을 찾은 노래 같다는 얘기다. 혹은 완벽한 윈윈이다. 블루스에 정통한 윤명운이 적확한 보컬리스트를 찾아내 완성한 이상적인 작품이다.
노래는 세련된 키보드로 시작한다. 사실 편곡의 지분이 대단히 큰 곡이라 말할 수 없는 곡이다. 노래의 문을 여는 건반을 제외하고, 기타와 베이스 등 축이 되는 악기들은 낮은 자세로 작품에 임한다. 침착한 연주를 뚫고 튀어나오는 괴물은 이상한 발성과 이상한 인사다. “여보세요”로 시작하는, 대화의 시작인 줄 알았지만 다 듣고 보니 혼잣말에 지나지 않았던 외로운 새벽의 넋두리이다. 몹시 늦은 밤 골목길에서 맞는 그 외로움에는 절정이 있고 곧 시작될 밝고 부산한 아침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아침을 보려, 아침을 보려 하네”). 그리고 가사가 곧 언젠가의 경험이었던 것처럼 사실적으로 쓰린 기억을 파고드는 한영애가 있다.
노래 속의 한영애는 한 사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취한 밤, 어쩐지 마음이 허해 차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골목을 배회하는 사연 많은 남자로 보인다. 노래의 흐름이 그렇고 노래의 내용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한영애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그렇다. 언제든 남장 가능한 탁월한 배우처럼 애초부터 한영애의 목소리는 여성음악과 남성음악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꾸준한 공연과 라디오를 통해 확산되었을 중성적인 매력은 흥행의 카드로 부상하기도 했다. ‘누구 없소’는 자신도 실감할 수 없을 만한 인기를 안겨주었던 곡이다. 그 즈음 한영애는 TV 무대에서 완벽한 콘서트를 진행하게 되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가수 한 명이 '젊음의 행진' 전체를 책임진 전례가 없었다”고 당시를 회고했을 정도다.
한편 ‘누구 없소’는 국내 블루스 계보를 설명할 때 언제나 거론되는 곡이다. 때때로 한영애는 한국의 재니스 조플린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하지만 블루스 전문 보컬리스트라 한정하기에 한영애는 표현의 폭이 너무 넓다. ‘누구 없소’가 수록된 2집 [바라본다](1988)에 참여한 작곡가들을 살펴보면 그냥 좋은 작품을 좋은 가수와 나누기 위해 동참한 드림팀으로 보인다. 일단 프로듀서는 위대한 탄생 출신의 송홍섭이다. ‘루씰’은 엄인호가, ‘바라본다’는 김수철이, ‘갈증’은 한돌이, ‘비애’는 유재하가 썼다. 다양한 작곡가를 만난 한영애는 블루스의 본질에 다가가기도 하지만 이따금씩 노래를 민요처럼 구성하기도 하고, 반면 어딘가에선 그냥 멈춰 서서 선율의 아름다움을 인정하고 그대로 따르기도 한다.
이렇게 스타일을 규정하기 어려운 와중에, 곡의 분위기를 따라 가장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작품은 단연 ‘누구 없소’라 장담해도 무방할 것 같다. 노래 속의 한영애는 계속해서 자세를 바꾼다. 숨어 있다가 어느 순간 나타나고, 호흡을 고르다가 갑자기 터뜨린다. 남자 노래인 것도 같고 여자 노래인 것도 같다. 서글픈 노래인 것 같지만 막판에 이르러 감정이 제대로 해소되는 후련한 구석도 있다. 구성지게 노래하다가도 난데없이 섹슈얼리티가 튀어나온다. 노래는 한영애의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한영애는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사람이다. 그리고 언제든 돌변할 수 있는 뮤지션이다.
해석의 범위기 넓은 한영애는 한참 시간이 흘러 트로트를 벗삼아 노래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후예들이 신중하게 한영애를 해석한다. 지난 해 한영애는 [나는 가수다]의 JK 김동욱이 이례적으로 ‘조율’을 경연곡으로 택하면서 잠깐 회자됐다. 같은 무대에서 장혜진이 ‘누구 없소’를 소화하기도 했다. 해석에 대한 평가를 떠나 어쨌든 음악은 돌고 돈다. 그리고 좋은 노래는 언젠가 다시 나타날 기회를 얻는다.
타이틀이 거창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원자폭탄으로 도시 하나를 순식간에 박살내버리거나 멀쩡한 강바닥을 파내서 생태계를 초토화시키는 정도쯤이나 되야 세상을 바꿨다고 얘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설득할 생각은 없다. 다만, 노래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투표의 작동원리와 비슷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한 장의 투표권이 공동의 지향과 만남으로써 세상을 (좋게든 나쁘게든) 바꾸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하나의 노래는 대중의 정서와 호응함으로써 한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규정하는 이정표로 우뚝 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바꾼 노래'들을 주목했다. 당초 1900년대 초반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전체를 아우르는 기획으로 준비했으나, 여러 가지 현실적인 여건의 제약으로 여기서는 1970년 이후 발표된 노래들을 시대순으로 소개하기로 했다는 점도 밝혀둔다. 더불어, 여기에 미처 소개하지 못하는 노래들은 언젠가 다른 방식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을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 드린다.
취미이자 직업으로 음악을 듣고 있다. 그리고 취미이자 직업으로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취미일 때 즐겁지만 직업일 때 고민되는 건 몇 년째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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